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왕륭은 뱃머리에 서서 포구를 바라보았다.

그립고 그리워 꿈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랐던 예성강 포구가 눈보라에 가려 흐릿해 보였다.

참으로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

출발할 때가 송악의 어린 소나무에 한창 물이 올라 푸름이 짙어질 무렵이었으니 초여름이었던가.

당나라를 거쳐 일본 니니와 지방에서 한참 동안 머물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서라벌까지 들렀었다.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으며 이익을 남겼고, 배마다 진기한 물건이 그득하게 실렸으니 성공적인 항행이 틀림없으나 왕륭으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포구에 배를 대고 뭍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드디어 배가 포구에 닿았다.

어서 빨리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아뿔싸! 환영객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륭은 포구에 나와 서 있는 집안의 가신들과 각 지방을 대표하는 장자들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왕륭이 무역항해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나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오늘만은 예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동생 평달이 달려와 반갑게 맞이하였다.

왕평달
“먼 길에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왕륭
“고생은 무슨…… 늘상 하는 일이 아닌가?”
유장자
“어서 오십시오, 왕성주”
강장자
“배마다 물건이 가득합니다. 가라앉지 않고 오신 것이 대견하오.”

강장자와 유장자가 건네는 인사말에 왕륭은 껄껄 너털웃음을 웃어 보였다.

유장자
“사방이 시끄러운 때입니다. 노중에 어려움이 많으셨겠습니다.”
강장자
“일본까지 가셨다구요?”
왕륭
“예. 돌아오는 길에는 서라벌에 들렸지요.”
강장자
“서라벌까지요?”
왕륭
“예. 여러 가지 왕실의 사정도 좀 볼 겸해서요.”
유장자
“그곳도 매우 어지럽다고 들었습니다만…….”
왕륭
“여기든 저기든 요즘 어지럽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가져간 물건들은 모두 동이 났답니다.”
강장자
“어련하셨겠습니까? 왕성주께서 실어 오는 물건들은 모두가 진귀한 것인데요. 서로 차지하려고 몸싸움들깨나 했겠습니다.”
왕평달
“형님. 예서 이럴 시간이…….”

모두 ‘와’ 웃는데, 대화에 빠져있던 평달이 한발 다가서서 나직하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왕륭은 눈짓으로 아는 척하고는 장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왕륭
“제가 오늘은 급히 가 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내자의 해산이 임박해서 말입니다.”
강장자
“아! 오늘입니까?”
유장자
“드디어 성주께도 후계자가 태어나는군요.”
강장자
“그래서 이 눈보라를 뚫고 굳이 돌아오셨구려.”

뭐가 즐거운지 또 ‘와’ 웃는 장자들을 뒤로 하고 왕륭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아이인가! 송악을 다스리는 성주로서, 나라 간의 무역을 담당하는 상인으로서 세상사 마음대로 못하는 일이 없던 왕륭이었지만 아이만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었다.

안 먹어 본 약도 없었고 영험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치성도 올려보았으나 도통 아이가 생기지를 않았었다.

그리하여 어느 때부턴가는 양자를 들여 가업을 잇게 해야겠다며 친자는 포기한 상태였었다.

그때 그가 찾아왔었다.

왕륭은 신라로부터 벼슬을 받아 송악 성주가 되었었다.

성주의 위신에 맞는 그럴듯한 저택을 짓기로 하여 그날도 동생 평달과 함께 집터 다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왕륭
“어떠한가? 이만하면 집터로서는 손색이 없지 않은가?”
왕평달
“송악에서 제일가는 자리옵니다. 이번에 벼슬도 받으시고 송악 성주님이 되셨으니 그럴듯한 저택을 가져야 합지요.”

왕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흡족하여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저만큼 웬 걸승 하나가 물끄러미 집터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보고 있던 걸승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것을 보며 왕륭은 불쾌하기도 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불현듯 들었다.

도선
“이런 쯧쯧쯧…… 메기장을 심을 자리에 베를 심는구먼!”
왕륭
“스님, 방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도선
“허허허…… 빈도의 허언을 들으셨나 보오이다.”
왕륭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메기장은 무엇이고 베는 또 무엇이옵니까?”

걸승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잠자코 염주를 굴리는 그는 망설이고 있는 듯 보였다.

한참 뒤, 왕륭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도선
“이 터가 그렇다는 말씀이오.”
왕륭
“이 터가요?”
도선
“허허허허. 이거 오늘 뜻하지 않게 하늘에 죄를 짓게 되었구먼.”
왕륭
“무슨 말씀이오신지?”
도선
“천기누설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걸승이 다시 허허허 웃더니 제대로 예를 갖추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도선
“나는 도선이라는 중이외다.”
왕륭
“네에?”

왕륭은 깜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걸승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도선’이라는 이름이면 충분했다.

하늘이 내리신 스님이라며 온 나라가 알아 모시는 신승이 아니시던가.

왕륭은 도선이 제 앞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광영을 입은 것만 같았다.

왕륭
“스님께서 그 고명하신 도선대사시란 말입니까?”
도선
“허허허. 고명은 무슨…….”
왕륭
“그런데 대사님 보시기에 이 집터가 영 아니란 말씀이시지요?”
도선
“집터는 아주 좋지요. 이 땅은 명당 중에 명당인 마두명당이오.”
왕륭
“마…… 마두명당……?”
도선
“그렇소. 이 땅의 지맥은 멀리 북쪽의 백두산 줄기를 타고 이어져 내려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떨어졌소이다. 그것을 풍수지리학적으로 수모목간(水母木幹)이라 하지요. 성주님의 운수는 물 수자라, 물의 운명이니 수지대수(水之大數)의 작우륙(作宇六)이라, 이곳에 집을 짓되 서른여섯 칸으로 짓고 방향을 이쪽으로 잡을 것이며 저쪽에 소나무를 심어 허한 곳을 막고 이곳에도 바위를 쌓아 기의 흩어짐을 막아야 할 것이오.”

왕륭은 두 눈을 부릅뜨고 도선의 손놀림 하나하나를 기억하여 뼈에 새겼다. 도선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도선
“지금까지 자손이 없었을 것이외다. 이 집을 짓고 나면 명년에 아들을 얻을 것이오.”
왕륭
“네에?”
도선
“그 이름을 세울 건 자, 건(建)이라고 하시오.”
왕륭
“건…… 왕건”
도선
“아드님은 용의 운명을 타고 나실 겝니다. 장차 한 나라를 세워 삼한을 다스릴 대성인이 태어나실 것이외다.”
왕륭
“성……인이라 하셨습니까?”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아들이라니, 게다가 그 아들이 용의 운명을 타고난 성인이라니, 왕륭은 충격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가슴 벅차오르는 환희를 느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도선의 예언대로 되고 있었다. 집을 완성하자 아내가 회임을 하였고 오늘이 아내의 출산일이었다.

눈보라를 뚫고라도 오늘 돌아와야 할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송악의 산길에도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심한 눈발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인데 신라의 군사들은 누군가를 추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발에 발자국이 덮여 보이지 않자 두리번거리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군사
“더 이상 발자국이 보이지 않사옵니다.”
장수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게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도록 하여라.”
군사들
“예”

군사들이 대답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장수는 하늘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날씨라면 바로 옆에 숨어 있다 해도 찾아내기 힘들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날이라면 수색도 힘들지만 도주도 힘든 법.

도주자들은 차라리 잡히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들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잡목 숲에 열 살쯤으로 보이는 궁예와 그의 어미 달지가 주변을 경계하며 숨어 있었다.

달지의 숨소리가 거칠면서 힘이 없었다.

병든 기색이 완연한 데다가 산비탈에서 구르기라도 한 듯 피 흘린 상처까지 곳곳에 나 있었다.

궁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지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궁예를 잡아끌었다.

달지
“어서 가자꾸나…….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쓰러져선 안 된다. 가자…… ”
궁예
“어머니, 왜 이렇게 도망쳐야 해요?”
달지
“나중에 얘기해 주마. 어서 가자.”
궁예
“군사들이 왜 쫓아오는 거지요?”
달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란다.”
궁예
“왜요?”
달지
“나중에 이야기해 준다고 하질 않니.”

버럭 짜증을 내다가 달지의 기침이 다시 터졌다.

기침을 이기지 못하여 비틀거리기까지 하던 달지는 왈칵 피를 쏟아 냈다.

피를 닦아 내던 달지는 겁에 질린 궁예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달지
“그동안 나중에 이야기해 준다 하고 한 번도 해 주지 않았었지?…… 이번엔 정말이다. 다 알게 될 게다. 범교 스님을 만나면 ……다…… 얘기해 주실 게야…….”
궁예
“범교 스님이요?”
달지
“그래. 세달사 범교 스님. 그러니 거기까지는 가야 해.”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달지는 눈보라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궁예는 손에 땀이 차도록 뜨거운 달지의 열기를 느끼며 어쩌면 이것이 도망 생활의 진짜 마지막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세달사 범교 스님에게 가자. 필사적인 그들의 모습은 짙은 눈보라에 감추어지고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눈보라가 잦아지고 예성강 포구는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그 사이사이 상기된 표정의 백성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먼 길 다녀오는 왕륭 일행을 구경하려는 인파였다.

그들 사이로 궁예와 달지가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달지가 옆을 지나던 행인을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달지
“저……. 여기가……. 여기가…… 어디랍니까?”
행인
“어디냐니? 아. 여기가 예성강 포구 아니오?”
달지
“예성강이라면…… 송악이란 말이지요……?”
행인
“그렇다니까요.”
달지
“허면…… 세달사…… 가는 길을…… 알고 계시는지요?”
행인
“세달사? 세달사라면 저기, 저 산 너머에 있는데…….”
행인2
“한 삼십 리는 더 가야 할텐데…… 저 산을 넘어간 다음에 다시 물어보슈.”

그때 행인 하나가 소리쳤다.

행인3
“어 저기 오시네.”

저 멀리 말을 탄 왕륭 일행이 보였다. ‘와’ 환성을 지르며 행인들은 왕륭 일행 쪽으로 몰려가는데 달지는 말대거리를 해 주던 사람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달지를 상대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미 대답할 건 다했고, 무엇보다 저기 왕륭이 인자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달지는 더욱 잡아 보려 하였고, 그때 또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얀 눈 위로 검붉은 각혈이 떨어지고, 달지는 서 있을 힘이 없어 주저 않으며 쓰러졌다.

궁예
“어머니……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 어머니…….”
달지
“구……궁예야, 궁예……야”

달지는 궁예를 부여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미처 잡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궁예가 할 수 있는 것은 달지를 흔들며 ‘어머니’를 부르는 것뿐이었고 왕륭 일행은 점점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행차에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던 군사들은 궁예 모자에게 다가와서 두말없이 달지를 들어내고 궁예를 밀어내려고 하였다.

궁예가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밀려나면 안 될 것 같았다.

작은 소란에 행차는 멈췄고, 평달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왕평달
“무슨 일이냐?”
군사
“떠도는 걸인들 같사옵니다.”
궁예
“우리는 걸인이 아니오,”

궁예가 다부지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왕륭이 돌아보았다.

왕륭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달지였다.

왕륭
“저런, 피를 토하지 않았느냐?”
군사
“병이 중한 듯합니다. 어르신에 폐를 끼칠까 하여…….”
왕륭
“이 엄동설한에 가여운 일이로구나. 거두어 주어라.”
군사
“하…… 하지만 이런 거러지들을…… 어디에?”
왕륭
“관아에 객사가 잊지 않느냐.”

군사는 오히려 당황하여 더러운 몰골의 모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거지들을 들이라고 있는 관아의 객사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러자 평달이 근엄하게 질책하였다.

왕평달
“어서 행하지 않고 무엇하느냐.”
장수장
“어서 치우…… 아니 데려가거라.”

평달의 질책이 있고서야 장수장이 군사들에게 손짓하며 명령했다.

군사들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유모를 부축해 갔고, 궁예는 고맙다는 표시인지 왕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들을 따라나섰다.

왕륭
“그 녀석 참.”

왕륭은 도전적인 궁예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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