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
“국가의 종묘사직이 위험에 처한 지금, 그대들은 백성과 나라를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녔노라. 전선의 괴로움을 과인이 어찌 모르랴. 허나 지나친 조심은 뒷날의 화를 부르고…….”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고려로 돌아갈 것을 윤허해 달라는 우통사 이성계와 좌통사 조민수의 거듭되는 요청에 대한 임금의 회신이 도착한 참이었다.

임금의 교지를 읽는 내관 김완의 목소리가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여기 여기 고려의 끝 압록강의 위화도에 오기까지 돌림병으로 죽어간 병사들을 화장하는 역한 냄새를 여러 번 맡았을 터였다.

병사들의 희생에는 아랑곳 않는 내관 나부랭이의 거만한 작태는 다음에 이어질 임금의 회신 내용을 짐작하게 했다.

엎드린 채 왕의 교지를 받던 이성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좌우에 부복한 장군들의 얼굴에도 분노의 기미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김완
“좌군, 우군 도통사에게 다시 한번 간곡히 명한다. 이 교지를 받는 즉시 군사들을 재촉해 국경을 넘으라. 하늘이 내려 준 기회를 어찌 소홀히 하는가. 속히 진군하라. 진군의 북소리를 울려라.”

회군 요청에 대한 명백한 거절이었다.

이성계는 엎드린 채 지난번에 임금에게 올린 장계의 내용을 곱씹었다.

[신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비로 물이 불어나 큰 내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첫 번째 여울목에서 떠내려 가고 빠져 죽은 군사가 수백이었습니다.

두 번째 여울은 더 깊은지라 건너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맛비에 활은 늘어지고 갑옷은 무거워 군사와 말이 모두 지쳐 있습니다.

억지로 몰아서 진격할 경우, 요동성을 빼앗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혹시 식량이라도 대지 못하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면 무슨 방법으로 대치하겠습니까? 부디 전하께서는 회군의 특명을 내리시어 온 나라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해 주소서.]

침묵이 무겁게 내린 군막 안이 갑자기 대낮처럼 환해졌다 곧 어두워졌다.

벌써 열흘째 내리는 장마에, 번개와 천둥까지 울려 대고 있었다.

위화도는 곧 장마로 불어난 황톳물에 잠길 것이다.

그런데도 진군만을 명하는 임금이라니.

10만 대군과 함께 물귀신이 되거나 역질에 걸려 죽기라도 하란 말이던가.

그리 간곡하게 여쭈었거늘…… 정녕 그렇게 아둔하게 저의 백성들을 죽음의 길로 내몬단 말인가.

이성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목구멍 깊이 밀어 넣었다.

김완
“뭐하시오? 우통사는 어서 전하의 교지를 받으시오.”

내관이 엎드린 채 분노를 씹고 있는 이성계를 재촉했다.

이성계는 일어나 교지를 받으라 재촉하는 내관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성계
“전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소이까?”
내관
“매우 침통해하셨어요. 어찌 감히 회군이란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냐고 하시며 무척 침통해하셨습니다. 하지만 황공하옵게도 노여움을 누르시고, 장군들의 노고를 치하하시는 어주를 친히 하사하시었어요. 주상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잊으시면 아니 되십니다, 장군.”

한 가닥 남았던 기대마저 배반당한 이성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이성계
“이자를 포박하여 군막에 가두어라!”

분노에 찬 이성계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고막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온천지를 뒤흔들었다.

조민수
“우통사! 어찌!”

좌통사 조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성계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퉁두란을 비롯한 이성계 쪽 장군들이 벌써 김완의 양팔을 잡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김완
“이게…… 무슨 짓이오? 나는 전하의 어명을 받고 온 어사외다, 장군!!!!”

김완의 절규에도 이성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을 재촉하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날 밤, 이성계는 홀로 망루에 올랐다.

높게 솟은 망루는 한층 심해진 비바람 속에 삐거덕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천둥과 번개가 쉼 없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하늘과 땅을 갈라 천지를 뒤집고야 말겠다는 듯.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자 한 길이었다.

이성계는 임금 우왕과 최영 장군의 윤허를 얻어 군대를 되돌리고 싶었다.

동북권 여진 세력 출신인 자신을 중앙 정치의 중심에 서게 해 준 최영 장군을 제 손으로 끌어내리고 싶지 않았다.

십팔자위왕(十八字爲王)이니 목자득국(木子得國)이니, 이 씨가 왕이 된다는 파자 참요가 유행한다지만, 그 노래는 왕의 장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이자겸 때부터 이미 퍼져 있던 참요였다.

곳곳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을 격퇴한 이성계를 왕이 될 목자라 부르며 자신을 찬양하는 백성들이지만, 백성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 조그만 소문에도 걷잡을 수 없이 돌아서기 쉽다는 걸 이성계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신진 사대부들이 있었다.

정도전의 무리처럼 백성을 위하지 않는 임금을 폐하고 새로운 왕도를 세워야 한다는 역성혁명파도 많았다.

하지만 고려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는 충절파도 여전히 많았다.

지금 회군을 한다는 건 충절파의 사대부 이색, 정몽주 등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하는 걸 의미했다.

존경할 만한 사대부의 피를 뿌리면서까지 걸어야 하는 길이 역성혁명의 길이었다.

시대가 조금만 더 평안했었더라면, 아니 동성의 미소년들을 시켜 후궁을 범하게 하는 음란한 생활을 즐기다 내시의 칼에 죽은 공민왕을 이은 위왕이 조금만 더 임금다웠더라면.

그랬더라면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구국의 대장군으로 남을 수 있었거늘.

하지만 역사는 결국 개인의 의지는 아랑곳없이 도도하게 제 갈 길로 가고야 마는 것인가.

이성계는 번개가 칠 때마다 잠깐씩 드러나는 고려의 벌판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조민수
“기어이 회군을 결행하실 작정이십니까? 왕명 없는 회군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면서도, 기어이 결행하실 것입니까?”

등 뒤의 목소리가 이성계의 상념을 깨웠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좌통사 조민수였다.

조민수가 갑옷까지 갖춰 입은 채 큰 칼을 차고 망루 입구에 서 있었다.

이성계
“곧 여기 위화도는 불어난 물에 잠기고 말 것이오. 10만 대군이 꼼짝없이 물에 빠져 죽으라는 게요?”

조민수가 이성계의 옆에 와 섰다.

번쩍거리는 번개 불빛 속에 벌써 부교 하나를 집어 삼키는 성난 강물이 보였다.

조민수가 불꽃이 일 듯한 눈으로 이성계를 쏘아보며 허리춤의 칼에 손을 댔다.

이성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민수를 바라보았다.

조민수
“우리가 출병해 올 때 팔도 도통사 최영 장군께서 소장에게 은밀히 내리신 칼입니다. 반역의 기미가 보이는 장수는 무조건 참하라는 뜻을 담아서 주신 칼이오. 그 어른의 우려가 근거 없는 기우는 아니었구려. 우통사께서 명하신 일은 누가 뭐라든 반역이외다.”

조민수가 칼 손잡이를 만졌다.

칼집을 반쯤 벗어난 칼날이 번갯불에 번쩍거리며 위험하게 빛났다.

이성계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조민수를 바라보았다.

조민수가 먼저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천천히 칼집을 허리춤에서 떼어 냈다.

조민수
“이 칼을…… 장군께 바치겠소. 하루에도 역질로 수십 명씩 죽어 가고, 아교가 녹아 쏠 수 있는 활조차도 없소이다. 우리 좌군도 겪고 있는 일입니다. 일단, 좌군도 함께…… 돌아가십시다. 장군의 회군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이성계는 멈췄던 숨을 비로소 내쉬었다.

그리고 칼을 바치는 조민수의 두 손을 맞잡았다.

희뿌연 빛이 새벽을 몰고 왔다.

둥둥 북소리와 함께 소라 소리가 뿌우뿌우 울렸다.

철군을 명하는 소리였다.

지독하게 퍼붓는 빗줄기 사이로 보병들과 기병들이 묵묵히 철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퉁두란
“장군, 철군 점고 준비가 끝났습니다.”

홀로 군막에 앉아 회군이 가져올 파장을 그려 보는 이성계를 퉁두란이 깨웠다.

이성계
“아우님, 나의 설득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저들이 듣지 않기로 작정하고 귀를 막아 버린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정녕 하늘의 뜻인 겝니까?”

혼잣말처럼 탄식하는 이성계의 물음을 퉁두란이 단호한 눈길로 받았다.

군막 밖에서 소라 소리가 길게 울렸다. 새로운 아침을 재촉하듯 길고도 힘찬 소리였다.

퉁두란
“장군,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망설이긴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고려의 관복을 벗어야만 할 때입니다.”

퉁두란이 이성계를 재촉했다.

이성계
“정녕 그리 생각하시는가?”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이기도 했다.

퉁두란
“이 퉁두란, 통사를 따라 전장을 누빈 지 수십 해입니다. 해마다 폭정에 주려죽는 가여운 백성의 숫자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고려에 희망이 있다 말할 수 있습니까? 저 백성들을 편안케 할 이가 장군 외에 누가 있습니까? 나라의 흥망이, 백성의 평안이 모두 통사에게 달렸습니다. 어서 명을 내리십시오. 오늘을 놓치면 하늘이 노하실 것입니다.”

이성계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무고한 내시와 양민을 베어 죽이며 선대왕인 공민왕의 비, 안 씨까지 탐하려 하는 패륜을 일삼는 우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위태로운 사직에 또다시 덕 없는 폭군이 나오는 건 고려의 국운이 다했다는 걸 의미했다.

이성계는 감았던 눈을 떠 퉁두란을 바라보았다. 망설임이 걷힌 투명한 눈이었다. 퉁두란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

이성계가 일어서 투구를 썼다.

1388년 5월 22일,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결단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