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

(잠언 27:1)

세계에서 가장 큰 헬기, Mi-26 헤일로가 굉음을 일으키며 눈보라를 뚫고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커다란 덩치에 걸맞게 1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지만 탑승객은 단 한 사람 에 불과했다. 두터운 방한복으로 단단히 무장한 그는 한국 과학계의 슈퍼스타였던 천재 물리학자 우석이었다.

‘이걸로 한 고비를 넘긴 건가. 어쨌든 연구는 계속할 수 있어. 그거면 된 거야.’

우석은 머리를 벽에 기대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몇 해 전,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은 후로 일체의 외부활동 을 중단한 그가 러시아에 입국한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세간에서는 그가 사별의 슬픔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우석은 지난 몇 년 동안 거대한 비밀 프로젝트에만 매달렸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기에, 스폰서의 존재가 절실했다. 여러 가지 사정 상 국내에서는 스폰서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우연 히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뜻하지 않게 ‘큰손’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 우석은 스폰서를 설득해서 성공리에 투자 증액을 이끌어내고 이제 막 연구소로 돌아가는 길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갑자기 갈증을 느꼈는지 우석은 전리품으로 챙긴 보드카를 점퍼 주머니에서 꺼내 뚜껑을 따고 병째 들이켰다. 마치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사람처럼 피로한 기색 이 역력했다.

우석은 눈을 비비며 점점 멀어져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제정 러시아 시절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우석을 벼랑에서 꺼내준 구세주가 살고 있다. 그 구세주는 다른 의미에서 21세기 러시아의 이면을 지배하는 ‘차르(옛 러시아 황제)’였다.

*

“정지형(停止型) 타임머신?”

아나톨리는 회의적인 어조로 되묻더니 검버섯이 핀 뺨을 일그러뜨리며 조소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아나톨리 리트비노프. 한국 나이로 치면 환갑을 넘긴 그는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부호이자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였다. 그 옆에는 감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30대 중반의 금발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우석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딘가 매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이미지를 지닌 그는 아나톨리 의 수행비서인 세르게이였다.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회의실에는 이들 세 명 외 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석은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거물을 독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며 어떻게 그를 설득할지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렸다. 다행히 아나톨리에게 심어준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은 듯했다. 거기에는 우석의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도 한몫 거들었다. 공략하기 힘든 철옹성 같은 아나톨리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이었다. 3분가량 이어진 전문용어 일색의 브리핑은 자칫 따분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아나톨리 회장은 우 석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묵묵히 경청했다. 오히려 그런 점 이 우석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타임머신의 핵심은 인공 블랙홀인데…….”

아나톨리 회장이 슬쩍 눈짓을 주자 세르게이는 허리를 굽혀 뭔가 귓속말로 짧게 설명했다. 가만히 듣던 아나톨리는 다시 우석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계속 이야기해보라고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우석은 내심 언짢은 기분도 들었지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선 인공 블랙홀을 만들려면,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LHC(대형 강입자 충돌기) 기준으로 100개가 필요합니다.”

그들 사이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 위로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우석이 언급한 LHC, 즉 대형 강입자 충돌기의 3D 모 형이 허공에 나타났다.

“LHC 100개라고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LHC 프로젝트 하나만 해도 6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런데 그게 100개라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세르게이가 피식 웃더니 조롱하듯이 물었다. 충분히 예상 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에 우석은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타임머신도 좋고, 다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채산성은 맞아야지. 난 사업가이지, 자선가는 아니라고.”

아나톨리가 한마디 거들었다.

우석은 대꾸하는 대신에 리모컨을 조작해서 준비한 홀로그램 영상을 띄었다. 이른바 그레이트 블루홀이라고 부르는 바다 속의 싱크홀 영상이 그들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자 아나톨리 회장이 흥미를 보이며 미묘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이건 꽤 익숙한 그림이군그래.”

“네, ○○해에 있는 그레이트 블루홀입니다. 러시아 국영 코어에너지 연구소가 근처에 자리하고 있죠.”

우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외적으로만 국영이지, 실소유주는 나야. 괜히 인수해서 골치만 아파. 당시만 해도 꽤 돈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선 그냥 후회스러울 뿐이지. 그런데 이게 무슨 소용이지? 내게 이걸 보여주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아나톨리가 물었다.

우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세계 도처에 나타난 블루홀 사진들을 홀로그램 영상으로 띄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블루홀 안에서는 중력이 다르게 작용합니다! 지구 평균 대비 1.2% 내외의 편차일 뿐이지만, 가속했을 때는 엄청난 차이가 됩니다.”

우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홀로그램이 시뮬레이션 영상으로 바뀌었다. 블루홀 내부의 중력 차이를 이용해 무한 가속을 하는 영상이었다. 그걸 보자, 두 러시아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우석이 의도한 바를 눈치 챈 것이다.

“이 시뮬레이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블루홀 안에서 입자들을 충돌시키면 육지 LHC의 대략 2∼300배의 가속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즉, 바꿔 말하면…….”

“나도 산수는 할 줄 아오. 그러니까 박사 말은 블루홀을 이용하면 인공 블랙홀을 만드는 데 육지 몇 백 분의 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로군.”

드디어 아나톨리 회장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우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단 오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블랙홀 안의 웜홀(worm hole)을 통해 시공간을 이동한다 는 이론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거 아니오?”

갑자기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회장을 보필하는 비서이자 기획실장으로서 그의 수완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얄팍한 과학적 지식은 우석을 실소하게 만들었다. 첫 대면을 하던 순간부터 은연중에 내비치던 인종차별적인 태도도 그렇고 어지간해선 가까워지기 힘든 상대란 생각이 들었다. 우석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습니다. 이론으로만 존재했지 지금까지 현실화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웜홀이라는 게 너무 민감해서 작은 물체 하나라도 감지되면 입구를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백문이 불여일견.

우석은 긴 설명보다는 눈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홀로그램으로 타임머신이 인공블랙홀 안에 형성된 웜홀을 통과하다가 산산조각 나는 과정을 시연해보였다. 세르게이가 그것 보라는 듯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우석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석은 그를 무사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 웜홀이 닫히는 걸 막으려면 일종의 ‘네거티브 에너지’ 가 필요합니다. 우리 팀은 일반 에너지를 네거티브 에너지로 변환하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우석은 잠시 말을 끊고 아나톨리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회장님께서 골칫거리라고 여기는 그 코어에너지를 이용해서 웜홀을 지탱할 수 있단 얘깁니다.”

두 러시아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우석은 준비한 히든카드가 제대로 통했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우석에겐 준비한 카드가 아직 한 장 더 남아있었다. 그것 은 확실하게 쐐기를 박을 수 있는 조커였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아나톨리는 세르게이가 건넨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우석의 개인정보를 철저하게 분석한 것이었다. 한참을 훑어보던 아나톨리 회장은 반격의 실마리를 찾았는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우석을 쳐다보았다.

“자료를 보니 애석하게도 2년 전에 아내를 잃으셨군. 그것 도 암으로. 실로 유감이오. 그런데 타임머신을 연구하는 게 혹시 아내의 죽음이랑 관련이 있소? 암 치료하는 약을 가지러 미래로 가려고?”

이미 예상했던 반응인데도 우석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채워지지 않는다. 우석은 가만히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숨을 골랐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고지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우석에겐 아직 상대를 무너뜨릴 확실한 카드가 한 장 남아있다. 이제 그 카드를 쓸 차례다.

“물론 미래엔 암이야 정복돼 있겠죠. 뿐만 아니라 그때쯤 이면, 줄기세포 치료기술 또한 완벽한 수준을 이루고 있지 않겠습니까?”

세르게이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고용주를 쳐다보았다. 아나톨리 회장 역시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두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그의 두 다리는 모두 의족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열풍이 소련을 휩쓸기 몇 해 전, 군부의 핵심멤버였던 아나톨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불의의 사고를 겪고 두 다리를 잃었다.

“우리 팀이, 제가 회장님을 줄기세포 연구가 완벽하게 성 공돼있는 미래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발로 땅을 걸으시는 거죠. 약속드립니다.”

아나톨리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대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아나톨리 회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세르게이에게 뭔가를 지시하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일단 장소를 옮기죠.”

세르게이가 말했다.

우석은 개선장군처럼 어깨를 펴고 세르게이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