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안 썸머라는 말을 아니, 숙희야? 쓸쓸한 내 인생에, 너는 화창한 날처럼 나타났어. 난 아직도 널 처음 봤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 긴 머리에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너를. 숙희야.]

요즘 찾아보기도 힘든 붉은 줄 원고지에 고집스럽게 꾹꾹 눌러쓴 편지라니.

편지를 접어 사물함에 넣은 숙희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강의실 찾아들어가기 바쁜 짧은 쉬는 시간, 사물함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숙희
‘누구야. 도대체.’

벌써 7일째다.

누가 정성스럽게 이 미친 짓을 매일 아침마다 얼굴도 드러내지 않고 하고 있는지.

숙희
‘세상 쓸데없이.’

숙희는 원고지 편지 7개가 담긴 작은 종이상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곤 사물함 문을 꼭 닫았다.

그러곤 묶이기엔 너무나 짧은 단발머리를 잡아당겨 고무줄로 꽉 조여 맸다.

사람들
“숙희야!”

뒤에서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렀지만 숙희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적어도 이 복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사람들
“야! 박숙!”

다시 한번 누군가 고집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다다다.

그때 긴 생머리를 한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와 아프지 않게 남자의 어깨를 때렸다.

박숙희
“어머! 선배님, 제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창피해요.”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제 이름을 부른 남자 선배를 밉지 않게 째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종강을 앞둔 대학 강의실 대부분이 그렇듯 숙희는 분주하고 혼잡한 강의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띵-.

가방에서 울린 핸드폰 벨소리에, 숙희는 책을 펴다 말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기 여사
[크리스마스 때 본가에서 저녁 식사 있는 거 알고 있지? 엄마는 못 가니까 너라도 꼭 늦지 않게 참석해야 해.]

확인한 문자를 바로 삭제한 숙희는 핸드폰에 음소거 설정을 해 놓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남 선배
“박숙 박숙, 너 그때 미팅 나간 건 어떻게 됐어? 애들 다 괜찮았다며.”
박숙희
“선배님, 저 까인 거 같아요. 저 별로예요?”

스무 명 남짓 남학생들한테 둘러싸인 여자와 순간 눈이 마주친 숙희는 무의식적으로 오늘 아침에 본 원고지 편지가 떠올랐다.

[인디안 썸머라는 말을 아니…… 긴 생머리에.]

숙희
‘아…….’

이제야 모든 게 설명이 된 듯하다.

7일째 자신에게 배달되고 있는 그 정체불명 편지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하늘하늘 흰색 원피스, 긴 생머리, 생글거리는 얼굴, 화룡점정으로 찍혀져 있는 보조개 정도는 있어야 공대 아름이라는 대명사 호칭을 받을 수 있지 싶었다.

제 이름과 같은 박숙희를 한참 쳐다보던 숙희는 이내 그것도 관심이 없다는 듯 짧은 머리카락을 더 짧게 질끈 묶고 책을 폈다.

끼익.

강의실 앞에 중형 세단이 부드럽게 정차를 하고 뒷좌석에서 체크무늬 남방에, 야구 잠바를 입은 숙희가 내렸다.

기사
“아가씨, 오후 5시에 정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숙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건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웅성웅성.

공대 건물 로비를 지나 사물함이 있는 복도로 향하는 숙희의 발걸음이 갑작스러운 소란스러움에 멈췄다.

숙희
‘뭐지.’

웬만해선 시끄러울 일이 없는 공대 건물이다.

숙희가 뭐지 하는 눈빛으로 복도 맨 끝을 돌아서자, 사람들이 사물함 주위에 몰려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
“야! 이거 꽃이냐?”
사람들
“공대 건물 사물함에 꽃이라니.”
사람들
“그건 그렇고 겨울에 꽃이 펴?”

누가 꽃을 받은 모양이다.

솔직히 그게 뭐라고 예대 건물에는 한 겨울에도 꽃향기가 가득하다는데.

숙희
‘하기야, 여긴 공대지.’

명동 한복판에서도 심심치 않게 맡을 수 있다는 화장품 냄새가 여기서는 암모니아 향기보다 귀하니.

사람들
“어?”

저들끼리 떠들다 하나둘씩 숙희를 발견했는지 소란스러움이 잦아들었다.

박숙희
“네 사물함에 꽃 붙어 있더라? 꽃!”

사람들이 물러서자, 오늘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박숙희가 숙희를 아는 척했다.

박숙희
“이것 봐! 편지도 있어. 오!”

자신이 받은 편지인 양 박숙희가 호들갑을 떨며 사물함 주인보다 더 기뻐했다.

숙희
‘그거 네 거야.’

숙희가 말하려던 찰나에 박숙희가 사물함에 붙어 있는 편지와 꽃다발을 떼 숙희에게 전했다.

박숙희
“난 네가 학교 졸업할 때까지 남자친구 한 명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대단한데?”

이걸 칭찬으로 들어야 하는지, 먹이는 걸로 들어야 하는지.

그 편지와 꽃다발이 박숙희 네 것이라고 말하려던 숙희는 입을 꾹 다물곤 꽃다발과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러곤 보란 듯이 사물함을 열어 오늘 받은 편지를, 지금까지 받은 원고지 편지 상자에 보지도 않고 집어넣었다.

사람들
“오! 저게 다 편지였어.”

동일한 원고지 편지를 발견한 사람들이 대박이라며 웅성웅성 거렸다.

사람들
“하기야, 우리 킴숙도 성격이 모가 나서 그렇지 얘가 나쁘진 않아.”

저걸 농담이라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몇 개 던지곤 사람들이 모두 강의실로 들어갔다.

뭔가 씁쓸한 표정의 박숙희도.

사람들이 다 사라지자 숙희는 오늘 받은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너를 만난 지 오늘은 90일 되는 날이야. 숙희야, 나는 매일 너를 생각해. 혹시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착각 같은 게 아닐까…….]

가슴 절절한 로맨스라니.

숙희는 원고지 편지를 접혀 있던 그대로 접어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그러곤 처치 곤란에 가까운 꽃다발을 짜증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편지야 주인이 알아챌 때까지 사물함에 보관하면 그만이라지만 이 꽃다발을 어쩌란 말인지.

사물함 문을 닫은 숙희는 사물함 앞에 적힌 제 이름표를 봤다.

‘숙희’.

성을 써 둘 걸 그랬나 보다.

만약 그랬다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착각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숙희는 어쩔 수 없이 꽃다발을 든 채로 강의실로 들어갔다.

끼익.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장소에 중형 세단이 정차를 했다.

다만 다른 날과 다른 게 있다면 뒷좌석의 숙희와 함께, 조수석에 탄 황 비서까지 내렸다는 것.

황 비서
“숙희 양, 이 건물인가요?”

숙희네 집안일을 봐 주는 황 비서가 정중하게 묻자, 숙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 비서
“사물함에 있는 물건은 제가 다 가지고 가겠습니다.”
숙희
“같이 갈 거예요.”
황 비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 시험 하나만 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숙희
“제가 챙길 물건이 있어서 그래요.”
황 비서
“알겠습니다.”

숙희는 황 비서를 대동한 채 사물함이 있는 복도로 향했다.

사물함에 있는 물건들이야 황 비서가 챙겨도 그만이지만 숙희가 그곳까지 함께 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원고지 편지.

[드디어 나는 확신을 얻었어. 너에 대한 내 사랑은 호르몬 이상에 따른 착각이 아니라는걸. 난 널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혹시 너도 나와 마음이 같다면 이번 크리스마스 때…….]

오늘도 역시나 주인을 잘못 찾은 원고지 편지가 사물함 앞에 붙어 있었다.

황 비서
“이건 뭔가요?”

황 비서가 흥미 돋는 눈빛으로 숙희를 쳐다봤다.

숙희
“황 비서님이 아시면 좀 곤란해지실 거예요.”
황 비서
“그럼 모른 척하겠습니다. 이 짐들은 모두 집으로 옮겨 놓겠습니다. 마지막 시험 잘 보시고요.”
숙희
“네. 들어가세요.”

황 비서가 모든 짐을 들고 자리를 뜨자 숙희는 편지를 다시 읽었다.

지금까지는 호기심일까, 착각일까, 애정일까 혼란스러웠던 편지 내용이 결국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숙희
‘하필 고백 날짜가 크리스마스라니.’

아마 편지를 쓴 사람은 이 학교 학생이 아닐 것이다.

이 학교 학생이라면 그 촌스러운 이름의 숙희라는 인물이 공대에 두 명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원고지 편지를 보니 전공이 공대 쪽 같지는 않았다.

숙희
‘국어국문 정도?’

첫 번째로 편지를 쓰겠다는 생각 자체를 공대생은 안 한다.

두 번째 그 편지를 수기로 작성할 생각도 공대생은 안 한다.

세 번째 원고지가 세상에 아직 존재하는 줄 공대생은 모르니까.

숙희는 백팩에 원고지 편지 상자를 쏟아 넣곤 마지막 시험이 예정된 강의실로 향했다.

박숙희
“오늘도 편지 받았어?”

강의실에 들어선 숙희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별로 친하지 않는 공대 아름이 박숙희였다.

숙희
“응.”

아직 박숙희한테 그 원고지 편지의 주인이 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다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는 것.

이젠 사실을 바로잡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돼 버렸다.

이 건물에서 수업 중인 모든 공대생들이 다 그 편지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박숙희
“너 근데 대단하다. 언제 연애 사업을 했어? 그 남자도 대단하다. 어떻게 매일 편지 줄 생각을 다했지? 로맨틱하다. 그지?”

그리고 속사포처럼 칭찬을 쏟아 내는 박숙희의 멘트 중에 진심이 느껴지는 게 하나도 없어서.

박숙희
“꼭 그 사람이랑 행복해져야 해. 알았지?”

뭐라 답할 틈도 없이 제 할 말만 딱 하고 떠나 버리는 박숙희를 숙희는 어이없다는 듯 한참을 쳐다봤다.

저런 쓸데없는 말은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별로 자신에게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아무튼 사실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은 있기에 숙희는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면 아무도 피 보지 않고 제대로 사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기 여사
“흐응. 흐응.”

숙희는 드레스룸에 있는 옷들은 다 꺼내 놓고 패션쇼를 하고 있는 기 여사를 무덤덤하게 바라봤다.

기 여사
“이 옷 어떠니?”

기 여사가 숙희에게 스팽글이 화려하게 붙어 있는 원피스를 들어 보였다.

숙희
“뱀가죽은 야만적이라는 여론 때문에 ‘우리는 그런 야만적인 행위를 하지 않아요.’하면서도 뱀가죽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류층 사회의 가식이 돋보이는군.”
기 여사
“말을 해도.”

기 여사가 입을 삐죽이곤 스팽글 원피스를 [2012년 겨울 바자회]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박스에 넣어 버렸다.

기 여사
“그냥 단정한 게 좋겠다. 이걸로 하자.”

가장 무난하게 검은색 미니원피스를 선택한 기 여사에게 숙희가 손뼉을 쳤다.

숙희
“기춘희 여사의 탁월한 안목에 찬사를.”
기 여사
“오늘 엄마는 바자회 때문에 함께 갈 수 없으니까, 예의 없게 행동하지 말고.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가만히 있고! 알았지?”
숙희
“어. 큰 아버지가 뭐라고 해도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고 큰 어머니가 뭐라고 해도 가만히 있을게.”

검은색 미니 원피스를 몸에 대 보는 숙희를 기 여사가 안쓰럽다는 듯 쳐다봤다.

기 여사
“그래.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고 싶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때가 올 때까지. 학교에서도. 알았지?”
숙희
“응. 오늘 약속 있어. 거기 갔다가 늦지 않게 본가로 갈게.”

의상을 갈아입은 숙희는 메이크업 팀이 준비하고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숙희가 들어오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메이크업 팀이 단정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메이크업 팀장
“오늘은 어떻게 할까요?”
숙희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스타일로요.”

숙희의 주문에 살짝 당황한 메이크업 팀장이 이내 뭔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리 깔린 교정,

대학원 연구실 몇 군데만 불이 켜져 있을 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쓸쓸한 교정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

도회적인 짧은 단발머리, 색조 화장이라고는 입술에 바른 붉은 립스틱이 전부인 숙희였다.

지금까지의 체크무늬 남방, 하나로 묶어 올린 고무줄 머리의 숙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몇몇 학생이 숙희 옆을 지나쳤지만 아무도 몰라볼 정도였다.

[공대 건물 스머프 동산에서 널 기다릴게.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나와 주길 바라.]

숙희는 원고지 편지를 작은 손가방에 넣으며 돌바닥이 설치된 공대 스머프 동산을 바라봤다.

그 꼭대기에서 연결된 ‘이쪽으로 오세요.’ 팻말까지.

숙희
“정성이 갸륵하네.”

사람 하나만 지나다닐 수 있을 돌길 양쪽으로, 큼지막한 양초가 스머프 동산 꼭대기까지 놓여 있었다.

바람에 꺼지지 않게 종이컵을 씌워서.

너무 유치해서, 사실을 바로잡고 뭐고 그냥 돌아갈까 싶었지만 이 수백 개의 양초에 불을 붙이고 종이컵을 씌워서 꽃길을 만든 남자의 정성이 갸륵해 마음을 고쳐먹었다.

숙희는 하이힐이 익숙한 듯 돌바닥 틈새를 피해 스머프 동산으로 올라갔다.

숙희
“헐.”

동산 꼭대기로 올라가니 더 가관이었다.

양초 꽃길 끝에 한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란색, 분홍색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꽃다발로 얼굴을 가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또각또각.

숙희의 하이힐 소리가 스머프 동산에 울렸다.

사람들
“어머! 어머!”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 있는 꽃을 든 남자의 친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숙희의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지자 꽃을 든 남자의 꽃다발로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잘 빗어 넘긴 머리, 반듯한 이마, 선명한 눈썹, 선한 눈매가 완전히 드러날 때 쯤 숙희가 그 남자 앞에 딱 섰다.

그리고 숙희는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남자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남자
“어!”

누구세요, 혹은 당신이 아닌데, 라는 말이 나올 때쯤 숙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숙희
“알아! 그 새끼 번호나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