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건 번호 97-0223호

경기도 일산, 사법연수원 제42기생 모의법정.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법정이 준비되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얹고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긴장한 탓인지 손바닥이 축축했다. 문 안쪽을 들여다보니 실제 법정과 다름없이 꾸며놓은 모의법정 안에 꽤 많은 이들이 앉아 웅성거리고 있었다.

‘침착하자.’

수십 번도 넘게 되새기고 심호흡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은 아직도 차분해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주문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빠, 기다려. 내가 힘낼게.’

놀랍게도 가슴이 조금 진정되었다. 나는 두 번째 주문을 속으로 외웠다.

‘잊어버리지 말자. 잊어버리지 말자…….’

어느 작은 것 하나도 잊어버릴까 두려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되새겼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고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그때, 바깥에서 재판이 곧 시작될 거라는 조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판사가 들어온다는 소리에 방청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검은 정장 재킷을 여미고 변호석으로 갔다. 판사가 조용히 재판석에 앉자 뒤를 따라 들어온 검사도 자리에 앉았다. 나도 변호인석에 선 채, 방청석 한가운데 모여 있는 증인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춘 뒤에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내가 자그마치 십오 년을 기다려온 재판이.

“사건 번호 97-0223호. 당시 경찰청장의 딸 최지영 양을 유괴 살해한 혐의로 1997년 3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 ‘이용구’에 대한 항소심 모의 공판입니다.”

판사의 목소리가 법정 구석구석을 묵직하게 울렸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동기들, 선배들, 교수님, 나를 믿고 여기까지 와준 십오 년 전의 증인들, 그리고 맨 뒤에서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또 다른 아빠까지.

모두가 시선을 모았다.

“그럼, 검사 측 변론하세요.”

판사의 말에 검사 역을 맡은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준비해온 자료를 펼쳐 들고 사뭇 딱딱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피고 이용구는 최지영 양을 유괴하여 성추행하고, 반항하는 피해자를 벽돌로 내리쳐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그 증거로 피해자 입술에서 피고 이용구의 타액이 검출되었고, 당시 현장을 지나던 목격자의 진술도 일치합니다. 혐의를 부인하는 피고인 측의 주장은, 따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더 이상의 이상적인 변론은 존재하기 힘들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수준의 변론이었다. 내가 검사였다고 해도 저렇게 말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용구의 변호인이다. 누가 봐도 범죄를 저질렀음이 분명해 보이는 피고, 이용구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저 완전무결해 보이는 변론에 어떻게든 반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변호인 측, 반론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방청석에 앉아 잔뜩 숨을 죽이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십오 년을 기다려온 건 나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잔뜩 긴장한 것이 역력한 몇몇 사람들이, 기대와 불안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재판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릴 땐 한없이 크고 높아 보이던 성벽이, 지금은 그저 손을 내밀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거창한 마음의 준비는 필요 없었다. 입을 열자, 준비했던 말들이 쏟아지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본 사건에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한 지적 장애인의 상세한 정황, 또한 그 지적 장애인과 함께 동고동락한 증인들의 진술을 통해, 정의로운 진실을 밝히고자 본 변호사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검사가 재빨리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닙니다! 명확한 증거와 확인된 진술로 죄의 유무만 판단하는 장소입니다!”

이의 신청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들었던 걸까. 무시해도 좋을 쓸데없는 소리였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었다.

“재판은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명확한 증거와 확인된 진술……. 그것만으로 죄의 유무를 판단했다는 부분이 이 사건의 가장 큰 오류입니다.”

내가 말해놓고도 얼핏 궤변으로 들리는 반론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진실인 것을.

역시나, 검사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판장님, 변호사는……!”

“오류요?”

의외로 말을 끊은 것은 판사였다. 판사가 되물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논거를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지금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검사는 이 사건을 배정받은 수사 검사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다른 사건과는 달리 당시 증거와 정황을 정확히 되짚어 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형사들의 날조된 사건 기록과 허위 자백만으로 검사는 판결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지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진행된 엉터리 수사와 누명. 당시 언론을 의식한 공권력의 횡포.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사건의 재조명과 재검토를 요청한 이유이자, 15년 뒤인 지금에야 비로소 승부를 걸 수 있게 된 배경이었다.

그러나, 검사는 비죽 웃으며 일어나 반문했다.

“그럼, 변호인은 그 당시 사건을 배정받은 담당 변호인이 맞습니까?”

방청석에서 몇몇 사람들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배심원 중심의 재판에서였다면 제법 효과가 있을 질문이었다. 당시 나는 고작 여덟 살이었고, 책을 읽고 구구단을 외우는 것이 고작이었던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변호인, 검사의 질문에 대답하세요.”

판사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나는 술렁이는 가슴을 짓누르며 간신히대답했다.

“……아닙니다.”

“이상입니다.”

검사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판사에게 말했다. 그가 한 점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떨어뜨리며 의자에 앉으려고 할 때, 나는 재빨리 몸을 내밀었다.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회심의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검사가 떨어지던 몸을 멈칫 세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고집스럽게 가라앉았던 판사의 눈동자가 의혹을 머금고 확장되었다.

“그곳에 있었다고요?”

판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똑바로 판사를 올려다보았다.

“네, 그곳에 제가 있었습니다.”

순간, 법정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법정 문이 열리고 서너 명의 학생 기자들과 언론사 기자들이 조용히 들어와 착석했다. 판사와 검사, 교수님들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사람들 속에는 수첩과 카메라를 꺼내 드는 이들도 몇몇 보였다. 말이 모의법정이지, 오늘의 재판은 결과에 따라 막대한 여파를 끼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이 모의법정이 그냥 단순한 시험으로만 끝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몇 달간 그들을 설득하고 계속해서 이메일을 보냈다. 처음엔 믿지 않았던 사람들도 내가 제시한 증거와 증인들의 말을 듣고는 끝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재판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법조인들과 경찰들, 그리고 수많은 권력자들을 향한 약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당시 나의 아빠에게 누명을 씌웠던 비겁한 사람들을 고발하기 위한 시위이기도 했다.

나는 재판장 가득한 술렁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부분은 모두 진실입니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십오 년 전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1997년 12월 23일 사형당한 피고 이용구.

나 이예승은, 그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