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 어린 소녀의 죽음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고, 서로 남남이었던 사람들을 가족으로 만들었고, 또 그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게 만들었다.

기나긴 싸움이 드디어 종착점에 이르렀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여기까지 오리란 예측을 하지 못했다.

한 어린 소녀의 죽음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고, 서로 남남이었던 사람들을 가족으로 만들었고, 또 그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게 만들었다. 아직 이지루한 싸움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나온 일에 대해선 다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이 싸움에 휘말렸지만 그 선택에 후회하진 않는다. 비록 처음에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라도 말이다.

이윽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재판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오늘, 우리를 여기에 오게끔 동기를 부여한 한 상구 씨, 여전히 천방지축처럼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재주가 탁월한 난주 선배,

뒤늦게 혜성처럼 나타나 우리에게 도움을 준 변호사 님,

아픈 기억과 아픈 몸을 이끌고 이 힘겨운 싸움에 동참해준 호창, 정애, 옥연 씨,

그리고 이들이 중도에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후원회 회원님들.

이제 잠시 후면, 우리의 절실했던 노력이 그 성과를 드러낸 다.

재판정이 고요해졌다.

경위가 정숙을 요구했다.

판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1. 내 이름은 한 윤미입니다

시커먼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윤미의 이야기

“한 윤미 학생.”

엄하게 생긴 면접관 아저씨가 내 이름을 부릅니다.

내 이름은 한 윤미입니다. 속초에서 택시 운전만 25년을 한우리 아빠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네.”

면접관 아저씨의 호명을 받은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 했습니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진성 반도체 공장에 입사하기 위한 면접을 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나온 면접관 아저씨들이 입사 지원한 아이들을 모아놓고 질의심사를 합니다. 나는 내 순서가 몇 번째였는지 까먹을 정도로 몹시 긴장했습니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괜히 마음이 들떠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호명을 받았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진 않았습니다. 웃는 얼굴로, 면접관 아저씨들을 바라보며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윤미 학생. 성적도 좋고, 결석도 없고,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시네?”

질문하는 면접관 아저씨의 표정엔 변화가 없습니다. 엄한 인상 때문인지 괜히 더 긴장되어서 혹시 말을 할 때 실수라도 할까봐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빠가 그랬습니다. 웃는 얼굴을 하면 작은 실수 정도는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네, 아버지는 택시 기사를 하고 계세요. 올해로 25년을 넘기셨어요.”

나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빠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너무나 착하고 성실한 아빠 얼굴을 생각하니 긴장이 풀립니다. 해리 포터의 마법처럼.

“우리 회사에 지원하는 이유는 뭔가요?”

다른 면접관 아저씨가 묻습니다. 꼭 우리 학교 학생주임 선생님처럼 우직하게 생기신 분입니다. 면접관 아저씨는 지원서를 꼼꼼히 살피며 내가 대답하길 기다립니다. 대답을 하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내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습니 다. 가감 없이.

“요새 서울 사람들은 전부 자가용을 타고 오니까요, 아버지 벌이가 예전만 못하세요. 그래서 저도 돈을 벌고 싶어요, 아버지를 도와서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면접관 아저씨들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표정을 보니,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면 뭘 하고 싶나요?”

또 다른 면접관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늘 생각해왔던 것이 어서, 이 대답만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빠 차 새로 바꿔 드리고, 엄마 일 그만하게 하고 용돈도 드리고, 또 남동생 대학도 보내주고 싶어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면접관 아저씨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보입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언뜻 그렇게 보였습니다. 역시 혼자만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참 좋습니 다. 왠지 꼭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많지 않았습니다. 면접에 앞서 담임선생 님께서 내 성적이라면, 그리고 손수 써주신 추천서라면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면접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몸도 건강하고 인성도 바르니까 꼭 합격할 거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듣기 좋은 말씀만 하셨겠지만 싫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좋은 느낌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로 수업이 없는 날이라 면접이 끝난 뒤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학교를 나왔습니다.

운동장을 지나 교문으로 가니 남동생 윤석이가 보입니다. 한참 멋 부리길 좋아하는 나이라 그런지 누나가 나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머리 모양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윤석이는 몸만 컸지, 아직은 철이 없는 막내입니다. 몰래 뒤로 가서 장난으로 동생의 뒤통수를 때려주었습니다.

“에라, 이 허세야.”

동생이 깜짝 놀라더니 뒷머리를 만지며 나를 흘겨봅니다.

“씨이, 왜 이제 오고 난리야.”

동생이 볼멘소리를 합니다. 며칠 전부터 오늘 면접을 본다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벌써 까먹었나 봅니다.

“오늘 면접 본다고 했잖아.”

그때서야 동생이 그러냐며 반색합니다. 물론 그러는 데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아직 철이 없는 윤석이는 누나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길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아, 정말? 붙은 거야? 그러면 나 람보르기니 사줄 수 있는 거야?”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람보르기니가 얼마나 비싼 차인 줄도 모르면서 허파에 바람만 들어간 내 동생, 윤석이. 그래도 구김살 없는 동생이 좋습니다.

“에휴, 정말 언제 철들래?”

“왜? 얼마 안 한대. 백만 원이면 산다던데?”

윤석이가 이렇습니다. 철없는 내 동생. 우리 집 막내.

“백만 원이 아니라 백만 달러겠지.”

내 말에 윤석이가 몰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습니다. 표정을 보니 정말로 백만 원으로 알고 있었나 봅니다.

“아, 그래? 백만 원이 아니고?”

몇 번이나 확인하는 윤석이를 보며 나는 조용히 웃었습니 다. 누나가 람보르기니는 못 사줘도 돈 벌어서 너 대학은 보내줄게.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윤석이가 어린애 취급받는 게싫다는 듯 정색을 합니다.

그때 택시 한 대가 달려와 우리 앞에 섭니다.

“윤미야. 윤석아.”

반가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릅니다. 내 동생의 이름도 불렀습니다.

아빠가 우리를 데리러 왔습니다. 오늘 면접 보는 날이라는 걸 알고 걱정이 되어 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아빠는 면접에 대해선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애꿎은 윤석이에게 화살을 돌립니다.

“저놈 바지 봐라. 저기에 다리가 어떻게 들어가냐. 입고 꿰맨 거야?”

아빠가 윤석이의 통 좁은 교복바지를 보며 잔소리를 합니 다. 요즘엔 저런 게 유행이라고 윤석이가 변명을 해봤지만 아빠에겐 통하지 않습니다.

“에이 씨. 아빠가 스타일이 뭔지나 알아?”

아빠는 그냥 윤석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웃습니다.

“인석아, 빨리 타. 너희 엄마 모시러 가야 해.”

엄마는 집 근처 김 씨 아저씨네 황태덕장에서 일을 합니다. 아무래도 아빠 외벌이로는 빠듯해서 조금씩 은행 돈을 빌리 다보니 그동안 빚이 쌓였나 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보려고 몇 해 전부터 덕장에 나가서 황태를 다듬고 품삯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아빠는 몸이 약한 엄마가 덕장에 나가는 것을 무척 미안해합니다. 당신이 무능력해서 엄마를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결코 아빠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엄마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한 번도 아빠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빠는 여전히 엄마에게 미안해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아주 급한 일만 생기지 않으면 가급적 매일같이 엄마를 데리러 갑니다. 툭하면 엄마에게 짓궂게 구는 김 씨 아저씨에게서 엄마를 구해줘야 한다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덕장으로 가서 엄마를 데려옵니다.

김 씨 아저씨는 아빠가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며 투덜대곤 합니다. 마치 자기를 엄마에게 일을 너무 많이 시키는 악덕고용인처럼 취급해서 불만이라고. 본의야 어떻든 아빠의 눈에는 정말로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하기는, 아빠는 가끔 밥상에서도 김 씨 아저씨를 흉을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 마누라를 너무 혹사시키는 나쁜 사람이라면서.

아빠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는 길에 황태덕장에 들러 엄마를 태웁니다. 항상 그렇듯 덕장을 나서는 아빠의 손이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우리 딸 오늘 면접 잘 봤나.”

“응, 잘 봤어.”

엄마가 우리를 보더니 환히 웃으며 조수석에 탔습니다. 온종일 황태를 다듬은 엄마한테서 생선 비린내가 나는지 윤석 이가 미간을 찡그렸습니다. 그래서 얼른 윤석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주의를 주었습니다. 다행히 엄마 아빠는 윤석이의 표정을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윤석이도 자기 실수를 깨달았 는지 슬쩍 창문을 내리며 딴청을 피웠습니다.

“일 안 힘드나? 좀 쉬면서 하지.”

아빠가 미안한 듯 엄마를 흘끗 보며 묻습니다.

“아, 집에서 놀면 뭐해? 애들도 다 컸는데?”

엄마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아빠에게 되묻습니 다. 아빠는 여전히 미안한지 엄마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미안해. 내가 못나서……. 다 갚을 거야, 그럼.”

이럴 때 아빠는 종종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그모습이 보기 싫어서라도, 나도 돈을 벌어서 빚 갚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취업이 결정된게 아니라서 그 대답은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엄마가 우리들 눈치를 보느라 아빠에게 잡힌 손을 슬그머니 뺍니다.

“비린내 안나나?”

엄마가 조심스레 묻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웃는 얼굴로 말합니다.

“뭐가 어때서? 마누라한테서 나는 건데? 향수보다 훨씬 낫지.”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편입니다.

아빠의 말에 엄마는 싫지 않은 듯 조용히 웃습니다. 윤석이도 조용히 차창을 닫고 노인네들이 주책이라며 미소를 짓습 니다. 나도 따라서 웃었습니다. 그리고 맘속으로 빌어봅니다. 우리 가족들이 지금처럼 웃는 날이 앞으로도 많았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