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감각이 돌아왔다.

후각, 청각, 시각.

약에 취해 마비되었던 모든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손목과 두 발목이 굵은 줄로 묶여있어 옴짝거릴 수도 없었다.

완전히 결박당한 채, 차디찬 거실바닥에 누워있었다.

이곳은 ‘마녀의 집’이다.

불편한 아이

이선은 이력서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맞은편에는 오늘의 마지막 면접자가 다소곳이 앉아있다. 요즘 젊은 사람답지 않게 과하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에 차분해 보이는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앞서 만난 면접자들은 지나치게 튀거나 너무 개성이 넘쳤다. 팀장인 이선의 입장에선 다루기 쉽지 않겠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해 보이는 이 마지막 면접자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착할 것 같이 생겼다. 착하면 다루기가 쉽다.

“세영 씨는 착할 것 같애.”

이선은 웃으면서 속내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제가요?”

세영은 수줍게 웃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느낌이 좋아.”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지 세영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 이런 친구들이 자기주장도 거의 하지 않고 시키는 일도 잘하는 편이지. 이선은 맘에 든다는 듯 흡족하게 웃으며 세영을 바라보았다.

“사실…… 저 되게 못됐어요.”

세영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이선이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예…… 저 많이 사악해요.”

“그렇게 솔직히 말하니까 나는 더 마음에 드는데?”

세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세영 씨는 왜 우리 회사에 지원을 했죠?”

이선이 물었다.

“회사 분위기도 따듯하고 좋아 보이고, 또 팀장님도 좋은 분 같으셔서요. 이곳이라면 저도 사랑받지 않을까 하고요.”

“따듯하고 좋다…… 틀린 말은 아니네.”

그래, 너는 합격.

이선은 세영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웃으면서 다가가 세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 잘 지내봐요.”

세영은 머뭇거리며 이선의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를 담은 제스처인지 몰라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선이 웃으면서 손을 더 내밀자 그때서야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드려요, 팀장님.”

세영이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그리고 내 말도 잘 따라주고.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 아이라면 그렇게 해줄 거라고 이선은 믿었다.

“신세영! 너, 정신 있는 거야?”

팀장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에 세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선이 눈을 부릅뜬 채 세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영은 주변을 의식했는지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선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걸 결제해 달라고 올린 거야?”

이선은 들고 있는 서류뭉치를 책상 위에 패대기치며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에 세영이 결제를 받으려고 제출한 서류들이었다.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세영에게 쏟아졌다. 쟤는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하나같이 조롱 섞인 시선들이었다. 단 한 사람, 청일점인 민호만 빼고.

“죄송합니다, 팀장님.”

모멸감 때문인지 세영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이선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선은 그런 세영이 한심한지 혀를 찼다.

“죄송? 지금 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야?”

이선은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

“대학을 나오면 뭐해. 엑셀, 파워포인트, 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잖아. 대체 잘하는 게 뭐니.”

이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첫인상은 말 그대로 첫인상에 불과했다. 착하고 말 잘 들을 거라고 여겼는데 겪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메사에 맹하고 갑갑했다. 벌써 입사를 한지도 몇 달이나 지났는데 업무 파악은커녕 기본적인 문서 작성도 제대로 하는 걸 보지 못했다. 어쩌다가 이런 영양가 제로의 무능한 아이를 뽑았을까.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세영은 풀죽은 목소리로 사과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뭐야. 죄송하다는 말 밖에 못해?”

이선이 쏘아붙였다.

“아뇨.”

“하여간에, 말대답은…….”

“다음부턴 잘하겠습니다.”

계속되는 면박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세영은 다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태도가 이선의 눈에는 반항으로 보이는 듯했다. 이선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이더니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음 언제?”

“그건…….”

“언제까지 해올 건데? 말해봐, 오늘 밤 8시가 마감인데, 시간 안에 이거 다 해올 수 있어?”

이선은 세영의 말허리를 자르며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 지금 할 노력을 아깐 왜 안 했는데?”

이선은 조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아까보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또 말을 끊을까봐, 세영이 곧바로 대꾸했다.

“어떻게 노력할 건데?”

“예?”

세영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까보다 더 노력한다며. 그러니까 그게 얼마만큼 노력할 수 있는데? 뭐, 목숨이라고 걸 수 있어?”

“목숨이요?”

이번에는 세영도 다소 놀란 모양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선은 그런 세영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겁나? 목숨도 못 걸면서 무슨 노력을 하겠다는 거야?”

이선이 다그치자 세영은 고민에 빠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걸 또 고민하고 있네. 그런 근성으로 참 잘도 하겠다.”

“…….”

말문이 막혔는지 세영은 계속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문득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선이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세영에게 새끼손가락을 펴보였다.

“그래, 목숨이 좀 그러면 손가락은 어때?”

다시 팀원들의 시선이 세영에게 쏠렸다.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요?”

세영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응, 손가락.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

이선은 어린애를 놀리듯이 물었다.

세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선의 장난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사이를 두고 세영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예, 알겠습니다. 손가락 걸게요.”

정색한 얼굴, 진지한 목소리.

의외의 반응이었기에 이번에는 이선이 당황했다. 하지만 팀원들 앞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곤 싶진 않아서 헛기침을 하고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래? 좋아. 그럼, 8시까지 못 끝내면 세영 씨 손가락 하나 포기하는 거야.”

“예.”

이선은 세영의 눈치를 흘끗 살피고는 서류뭉치를 들이밀었다.

“뭐해? 손가락 짤리기 싫으면 빨리 가서 일 해야지.”

세영은 서류뭉치를 받아들고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선지 자리로 돌아가다 말고 홱 돌아서더니 다시 이선에게 걸어왔다.

“저…….”

팀원들을 의식했는지 세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또 뭐?”

이선은 팔짱을 끼고 용건이 남았냐는 듯이 물었다.

“그럼 만약 제가 시간 맞춰서 일을 끝내면 팀장님은 어떻게 하실 거죠?”

세영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당당한 태도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