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가려는 욕망, 그 자체가 의미야….

그런것이 없다면 죽은거나 다름없지.”

1부

어둠 속에서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내린 눈은 높이 솟은 빌딩의 불빛에 때 이른 모습을 드러냈고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도 은은히 내려앉았다. 불빛에 비춰진 서이경과 이세진의 모습은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경이 도시적인 세련미와 기품 있는 우아함을 발산한다면 세진은 주위 사람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싱그러움과 해맑은 풋풋함이 있었다.

“밖에서 밥 한번 같이 못 먹었구나.”

“바쁘셨잖아요.

이경이 건네는 다정한 말에 세진이 발랄하게 대답했다.

“네가 수고 많았지.”

“대표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에요.”

이경은 세진의 흠잡을 데 없는 대답에 웃음을 내비쳤다.

“듣기 좋은데? 맛있는 걸 사줘야겠다.”

이번에는 세진이 웃음을 보였다. 이경은 와인 목록이 적힌 메뉴판을 펼치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친구하는 김에 술상무도 할래?”

“운전 괜찮으시겠어요?”

“대리 부르면 되지. 여기 샤토 마고 1996년산.”

세진은 이경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터는 기다렸다는 듯 식탁 위를 풍성하게 꾸몄다. 그는 아름다운 두 여인을 모시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와인이 몇 순배 돌자 그녀들은 웃음소리를 높이며 가볍게 손을 잡는 등 더할 나위 없는 정겨운 모습을 보였다. 웨이터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한 화폭에 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웨이터는 이경과 세진이 빈 잔을 내려놓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

둘은 동시에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세진은 눈길을 돌려 이경을 살폈다. 이경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고마워요.”

세진은 생각지도 못한 이경의 승낙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웨이터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져와 두 사람 앞에 섰다. 이경과 세진은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이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남기고 나란히 고개를 돌려 한 방의 플래시를 받았다. 웨이터는 과장되게 즉석인화지를 흔들었다.

“수고했어요. 사진 내려놓고 이제 일 보세요.”

조금 전과 달라진 이경의 다소 냉담한 말투에 웨이터는 당황하며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잠시 생각했다. 복장과 언행, 요리를 내오는 시간, 적당한 양의 와인, 모든 게 완벽했다. 다만 인화지를 다소 경박스럽게 흔든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이경은 와인을 한 모금 삼킨 후 다정한 말투로 돌아왔다.

“세진아.”

“네, 대표님.”

“네가 뭘 하려는지 알아. 근데 그거 실패할 거야.”

“멈추게 할 거예요. 대표님을 좋아하니까요.”

이경은 곧장 대답치 않고 희미하게 웃었다. 세진은 밝은 표정으로 이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진에게 다가갔다. 세진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경은 평소 둘 사이에 그어놓은 가상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세진은 피하지 않았다. 이경은 세진을 꼭 껴안았다. 세진은 그대로 서서 먹먹함에 눈을 감았다. 이경은 세진의 귓가에서 담담하게 속삭였다.

“네 세상은 이제부터 지옥이 될 거야!”

세진은 눈을 천천히 뜨며 이경을 꼭 껴안았다.

“대표님이 괴물이 되는 걸 구경만 하지 않을 거예요!”

포옹을 푼 이경은 가방을 들고 테이블 위에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사진, 잘 나왔구나.”

이경은 돌아서 곧장 출구로 향했다. 이윽고 그녀가 사라지자 세진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테이블 위 사진이 세진의 눈에 들어왔다. 세진은 사진을 집어 들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세찬 눈발이 창문을 두드렸다. 세진은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

가섰다. 더욱 굵어지는 눈발 너머로 환한 불빛이 보였다.

‘불야성!’

세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뜻 밖 의 만 남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진은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뚫을 듯 높이 솟아 오른 빌딩들이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빗물 때문인지 찬 밤공기 때문인지 세진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줄까?”

유나가 얇은 담배 한 가치를 건넸다. 세진은 보통 담배를 선호하지만 일단 받아 쥐었다.

“긴장하지 말고, 일단 왔으니 언니나 한번 보고 가.”

유나의 말에 세진은 바로 옆에 언니란 사람이 있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밝은 불빛이 은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지하에서 새어나왔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길게 한 모금 들이키고 내뱉었다.

“들어가자.”

세진이 담뱃불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지나가던 이들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경계의 눈빛보다는 선망의 눈빛이었다. 세진은 그만큼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매력이 있었고,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진과 사뭇 다른 매력을 소유한 유나는 씩 웃으며 지하로 앞장서 내려갔다.

“한창 바쁠 때 오면 어떡하니? 곧 2부 타임인데…….”

언니라 불리는 마담이 세진을 찬찬히 훑다 입을 닫았다. 세진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그 눈빛을 당당히 받았다.

“얘 일 끝나는 시간 때문에요.”

유나가 세진을 거들었다. 마담 귀에는 이미 그녀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물건이다! 마담은 세진을 보며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표를 내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여기가 어딘 줄은 알고 왔지?”

“네, 텐프로잖아요.”

세진은 옆 룸에서 들리는 밴드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맞아…….”

마담은 자신 있게 대화를 이끌지 못했다. 꼭 잡아야 해! 마치 자신이 면접을 보는 것처럼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세진이 그녀를 당돌하게 쳐다보았다.

“그래, 괜찮아 보이는구나. 그럼 마이킹을…….”

세진은 뭔 말인지 고개를 갸웃했다. 성급했다! 마담은 마이킹을 대체할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잠시 멈칫하다 조심히 말을 꺼냈다.

“선, 선수금이라고나 할까.”

“일수 같은 거예요?”

“그건 아니고. 네가 대출받는 건 아니잖니.”

잠시 정적이 흘렀고, 세진이 정적을 깨뜨렸다.

“아무튼 마이킹이 얼만데요?”

“달에 이천부터 시작할까?”

세진은 예상보다 금액이 너무 커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런데 마담에게는 세진의 표정이 실망의 표현으로, ‘그것밖에 안 돼?’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마담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잡고 싶다는 욕구를 속 시원히 내질렀다.

“달에 삼천!”

유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엔 특급 대우였다. 세진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마담 역시 눈을 감았다. 세진은 결심이 선 듯 눈을 떴다.

“잘 알겠습니다.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세진이 일어섰다. 마담은 실망했고, 유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면담을 마치고 나왔지만 밤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잠시 흔들렸었니?”

유나가 우산을 펴며 넌지시 물었다.

“모르겠어. 너무 상상 밖이라 판단할 수 없었어.”

“뭘 상상까지 하고 그래. 간단해. 돈이잖아. 넌 휴학 중이고, 월급까지 밀린 직장에다가 밤늦게까지 알바하고…….”

자기 처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 아직 말을 못했지만 알바도 오늘 잘렸다. 할 말이 많았지만 세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네가 원해서 난 데려왔고. 그럼 뭔가 리액션이 있어야지.”

유나의 채근에 세진이 입을 열었다.

“맞아. 돈이 필요해. 물론 이 일로 큰돈을 빠른 시간 내에 벌겠지만……. 모르겠어.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돈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부리는…….”

“뭔 개소리야. 내 돈 천오백이나 갚고 말해.”

세진은 미안함에 입을 다물었고, 유나는 그런 세진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농담이야. 천천히 갚아도 돼. 이 일도 쉽지 않아. 많이 버는 만큼 나가는 돈도 많아. 날 봐. 그리 밝진 않지?”

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나를 유심히 살폈다.

“됐다. 내일 네 계좌로 조금 송금할게.”

유나가 세진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이며 말했다. 세진은 미안함과 고마움에 그저 헤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진은 유나가 건네는 담배를 묵묵히 받았다.

세진과 유나가 단짝이 된 것도 사실 담배 때문이었다. 둘은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출중한 외모와 화끈한 성격으로 주위의 과도한 시선을 받았다. 막상 둘은 담담했지만 친구들은 두 사람의 미모 순위 매기기에 연연했고, 그렇게 둘은 조금씩 서로를 날카롭게 경계하는 사이가 되어 갔다.

1여 년 간 거의 서로를 무시하며 지내다 수학여행에서 처음으로 말을 섞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담배 때문이었다.

“라이터 있니?”

담배 생각에 한밤중 숙소 뒤편에서 우연히 마주친 둘은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유나는 무덤덤한 척 담배를 꺼냈지만 불이 없었고 세진은 불이 있으나 담뱃갑이 비어 있었다. 유나가 말없이 건네는 담배를 세진이 받아 쥠으로써 둘은 쌍생아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둘 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었고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한다는 공통분모가 크게 작용했다. 다만 세진은 없는 살림에 화목했고, 유나는 없는 살림까지는 비슷했지만 아주 날 선 집안에서 힘들어했다. 결국 가출한 유나를 세진이 한동안 보듬었고, 지금껏 끈끈한 사이를 유지해왔다.

“부담스러우면 내가 이 일 하기 전에 하던 일 물려줄까?”

유나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세진은 멀뚱한 얼굴로 깊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