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품名品, 혹은 마스터피스Masterpiece.

사전적 의미는 뛰어나거나 널리 알려진 물건. 브랜드 역사에서는 처음엔 가내수공업 제품을 가리켰고, 생산성을 위하여 가내 수공업자와 지주 회사가 결합한 뒤에는 뛰어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는 값비싼 브랜드를 지칭했다. 그리고 오늘날 명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하기도,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도 한다. 거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그렇다면 수많은 여성들은 왜 명품에 열광하는가. 우리는 여기, 특급호텔 연회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단상 위에 서 있는 젊은 남자는‘아르테미스 코리아’의 최연소 회장이다. 프랑스 이름 장티엘 샤, 한국 이름 차승조. 독특하고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으로 아르테미스 코리아의 첫 한국인 회장으로 부임한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들어보자.

“전 세계 여성들은 왜 명품에 열광할까요? 프랑스 여성들은 전통과 가치를 따져 명품을 사고, 일본 여성들은 소속감 때문에 삽니다. 남들 다 있는데 나만 없으면 튀어 보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떨까요?”

승조의 말에 따라 대형 스크린 속 풍경이 바뀌었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도쿄의 긴자 거리, 그리고 서울의 청담동 거리. 이제 화면은 서울 지하철의 전동차 안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학생, 직장인, 아기 엄마… 직업도 연령도 제각각인 이 여자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이 도드라졌으니, 바로 그녀들의 어깨에 걸쳐진 아르테미스 핸드백이었다.

아아, 놓칠 뻔했으나 우리는 방금 딱 한 명의 예외를 발견했다. 캔버스 가방을 멘 앳된 얼굴의 젊은 여자. 그녀의 가방은 아르테미스는 물론 어떤 브랜드의 제품도 아니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여자는 전동차의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순간, 수많은 아르테미스들의 물결에 휩쓸려 뷰파인더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우리의 시야 밖으로 밀려난 저 여자는 그대로 두고,차승조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 한국 여성들은 남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명품을 삽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요즘은 너도나도 명품 백 들고 다니는데 무슨 차별화냐? 그러게요. 우리나라 여성들은 무슨 차별화를 추구하는 걸까요?”

단상 아래에서 승조의 말을 경청하던 지사장들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옆 사람을 힐끔거렸다. 맨 앞에 앉아 있던 지사장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명품의 본질인 희소성에 가치를 둔다는 뜻 아닙니까?”

승조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입니다만 우리나라 여성들은 그딴 거에 관심 없습니다. 명품의 가치가 희소성이라면 우리 아르테미스는 명품이 아니죠. 대학생이고 애 엄마고 할머니고 너도 나도 아르테미스인데 그게 무슨 명품입니까? 그냥 비싼 가방이고 사치품이지.”

승조의 미소는 어느덧 냉소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차갑게 식어 있던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차별화라는 건 오로지 가격, 가격이에요! 남들보다 더 비싼 가방! 더 비싼 구두! 그런 것을 걸치고 있어야 남들보다 더 잘나 보이는 줄 아는, 그런 방식으로밖에 스스로를 차별화하지 못하는, 한심한 족속들. 그게 바로 우리나라 여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월급 몇 배나 되는 가방을 빚내서 사고, 할부로 사고, 투 잡 쓰리 잡해서 사고, 남자 등쳐서 사고!”

속사포처럼 빨라진 말투, 경멸과 비아냥거림이 범벅된 목소리, 승조는 흥분하다 못해 이제 치를 떨고 있었다. 그는 좌중이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승조의 입가에는 다시 옅은 미소가 떠올랐고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여성분들이 우리 아르테미스의 고객님들이시죠. 그러니 지사장 여러분, 값을 더 올리세요. 아, 물론 지금도 높은 가격에 대한 클레임이 많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어차피 우리가 파는 건 명품이 아니라 공포니까요.”

공포라니? 지사장들의 얼굴에는 불안을 넘어선 의문이 가득했지만 승조는 득의양양, 여유만만 했다.

“값이 오르면 오를수록 아르테미스 가방이 없는 나만 후진 것 같고, 나만 못 나가는 것 같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바로 그 공포 말입니다.”

승조는 또박또박,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문장을 말했다.

“아르테미스는 오늘보다 내일, 더 비싼 브랜드여야 합니다.”

2★

“저는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승조의 프레젠테이션 스크린 속에 잠깐 얼굴을 비추었던 젊은 여자, 캔버스 가방을 메고 전동차 안에 서 있던 한세경이 여기 있다. 그녀는 청담동에 있는 지앤의류 본사에서 면접 중이다. 환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올라간 입술 끝이 가늘게 떨린다.

세경 앞에 놓인 긴 테이블 맞은편에는 면접관들이 앉아 있다. 면접관 중 왼쪽 끝에 앉아 있는 도도한 인상의 여자는 디자이너 팀장이자 지앤그룹 회장의 막내딸 신인화다. 세경은 모른다. 단정하게 차려 입었지만 명품은커녕 브랜드 제품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이 들어서는 순간 인화가 자신에게‘D’를 주었다는 사실을.

“저는 집안 형편상 유학도 다녀오지 못했고, 그 흔한 어학연수 한 번 못 갔습니다. 하지만 높은 학점으로 은화여자대학교 의상디자인과를 차석 졸업했고, 스펙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독학으로 프랑스어 1급 자격증도 땄습니다. 또 각종 패션공모전에서 입상한 경력도 여러 번 있고요.”

그리고 세경은 모른다. 자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인화의 채점표에 빨간색 플러스펜으로 사정없이‘D’가 표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중앙에 앉은 남자 면접관이 프랑스어로 자신의 신조를 말해보라고 하자, 세경은 침착하게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Effort fait moi(노력이 나를 만든다).”

세경은 잠깐 사이를 두고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을 이었다.

“제 아버지는 제빵사로 동네에서 30년간 베이커리를 하셨는데,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레시피북과 같다고요. 빵을 만드는 일은 1그램도 틀리지 않게 레시피를 충실히 재현하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인생도 원칙대로 성실하게 살면 실패하지 않는다고, 노력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간, 사장실에서는 지앤그룹의 아들이자 지앤의류의 사장인 신민혁이 가죽소파에 앉아 모니터로 면접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혁의 아내인 서윤주는 남편의 찻잔에 차를 따르다가 화면 속 세경의 말을 따라하며 피식 웃었다.

“Effort fait moi.”

“왜?”

민혁이 묻자 우아한 트위드 수트 차림의 윤주는 미소 띤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하나도 안 변해서요.”

면접이 끝난 뒤 인화는 오빠의 납득할 수 없는 지시에 짜증이 났다. 총점 D의 최하점 면접자를 합격시키라니. 1년 계약직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주문이었다. 인화는 세경의 이력서를 책상에 내팽개쳤다. 짚이는 게 있었다.

무슨 말로 오빠를 구슬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우같은 올케의 농간이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인화가 세경의 이력서를 내던진 그 순간, 세경은 청담동 명품 거리를 뛰듯이 걷고 있었다. 명품 코트를 온몸에 휘감은 여자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명품 숍들이 이토록 정답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엄마에게, 남자친구에게, 동창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합격 소식을 알리며 세경은 울다가 웃다가 했다.

백수 생활 3년 만에 얻은 첫 직장. 모르긴 해도 지앤의류에서 유학파가 아닌 디자이너를 채용한 것은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여기저기에 얼마나 전화를 해댔는지 휴대전화를 든 손이 잔뜩 곱아 있었다. 세경은 벅찬 마음으로 뒤돌아섰다. 그녀는 자신이 걸어온 청담동 거리의 명품 숍과 디자이너 편집숍과 고급 빌라촌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선전포고를 했다.

“두고 봐! 나도 여기 청담동에서 숍 내고, 성공하고, 그리고 여기서 살 거다!”

3★

첫 출근을 할 때까지 세경의 부푼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사수인 김 대리에게 업무 지시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경에게 주어진 업무는 ‘지앤의류 사모님의 심부름’. 분명 디자이너로 지원을 했는데 사모님 심부름꾼이라니? 세경은 애써 실망의 표정을 감추며 김 대리에게 물었다.

“전 디자이너를 채용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왜 전 디자인을 안 하고 다른 업무를….”

여성스러운 인상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새 꽁지처럼 질끈 묶은 김 대리는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꼴찌였어요.”

“네?”

“한세경 씨가 이번 채용에서 꼴찌였다고요.”

꼴찌! ‘Effort fait moi’가 인생의 신념인 세경이 단 한 번이라도 꼴찌였던 적이 있었던가. 예고에서도, 대학에서도, 그녀는 늘 1, 2등을 다투었다. 그뿐인가. 각종 공모전에서도 예외 없이

수상권에 들었던 세경이었고, 부모님에게도 남자친구에게도 만점짜리 딸, 만점짜리 여자 친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왜 꼴찌인 자신을 채용한 거냐고 세경이 묻자 김 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미스터리죠.”

교육 중이긴 했지만 오전 내내 세경에게는 변변한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누구도 세경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고 알은 체해 주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혼자 남은 세경은 디자이너실을 나왔다. 주차장 옆을 지나치는데 번쩍번쩍한 은빛 외제차가 멈춰 섰다. 세련된 쇼트커트, 트렌디한 옷차림. 차에서 내린 사람은 인화였다. 세경은 면접실에서 보았던 인화를 한눈에 알아보고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기, 신인화 팀장님 맞으시죠? 새 브랜드 ‘클럽A’ 론칭하신… 저는 이번에 입사한….”

“한세경 씨?”

잔뜩 움츠려 있던 세경의 어깨가 약간 펴졌다. 팀장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

“네, 맞아요. 저 근데… 제가 이번 채용에서 꼴찌였나요?”

‘꼴찌’라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발음할 때, 세경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인화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김 대리에게 확인한 사실이지만, 막상 인화의 대답을 듣자 충격과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세경은 자꾸 아래로 숙여지려는 얼굴을 가까스로 들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유학을 안 다녀와서 그런가요?”

인화는 묘한 표정으로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실제 키는 비슷했지만 하이힐을 신은 인화와 낡은 단화를 신은 세경이 마주서자 인화가 10센티미터 이상 더 컸다. 그러나 세경이 느낀 위압감은 인화가 자신을‘내려다본다’는 점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세경은 절박한 표정으로 인화를‘올려다보면서’대답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건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인화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인화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 뒤에도, 세경은 그 자리에 서서 수수께끼 같은 그 말을 해석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경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

는 것은, 짧은 점심시간이 끝난 뒤 또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외로운 섬처럼 보내야 할 긴 시간이었다.

4★

주말에는 대학 동창인 다은의 결혼식이 있었다. 강남의 특급호텔 웨딩홀에서 열린 결혼식은 호화로웠다. 예식이 끝나갈 무렵 하객들의 테이블로 스테이크와 와인이 서빙 되었다. 세경과 친구들이 둘러앉은 테이블의 이슈는 단연 세경의 취업이었다. 세경과 예고 때부터 베스트프렌드였던 아정은 특히 호들갑스럽게 세경을 추켜세웠다.

“우리 전부 MD로 빠질 때 혼자 디자이너 고집하더니 결국 해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