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75년.

촤하악!

얼음물이 쏟아졌다.

정신을 잃고 있던 청년이 눈을 홉떴다.

청년
“허억……!”

대설(大雪)에 접어든 12월.

졸지에 찬물을 뒤집어쓴 그는 숨이 멎을 것처럼 헐떡댔다.

하지만 가슴팍을 짓누른 줄 때문에 오히려 고통스럽기만 하다.

청년
‘묶여 있다?’

청년은 의자에 묶여 있었다.

긴장과 흥분이 흐릿했던 시야를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칠이 벗겨진 천장.

드럼통의 장작불.

양동이를 들고 있는 사내.

탱그렁!

사내가 양동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씩 웃는다.

금니
“잘 잤어? 부족하면 더 끼얹어 줄까? 키킥!”

금니 몇 개가 드러났다.

그자가 물을 끼얹은 게 틀림없다.

청년
“여긴…….”

청년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찢어진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다 굳었고 다리에는 감각마저 없었다.

청년
“여긴 어디지?”

갈라진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환풍구 날개가 삐걱대며 돌아가는 소리가 불길하게 들려왔다.

금니
“이것 봐라?”

금니는 의자를 끌고 와 청년 앞에 앉았다.

신기하다는 듯이 상대방을 쳐다본다.

금니
“희한한 놈일세. 보통 납치당한 놈들은 겁부터 집어먹기 마련인데.”

나이가 많아 봤자 30대도 안 돼 보이는 청년.

그는 추위와 통증 때문에 떨고 있기는 했지만 눈빛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짜악!

금니가 예고도 없이 따귀를 갈겼다.

어찌나 우악스러웠는지 청년이 의자 채로 넘어졌다.

쿠당!

금니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지금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작가 선생.”

금니의 구둣발이 청년의 옆머리를 짓눌렀다.

금니
“그딴 눈을 하고 있으면 뽑아 버리고 싶잖아. 응?”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뺨이 우둘투둘한 바닥에 갈리면서 상처가 났다.

금니의 말대로 청년은 작가였다.

얼마 전부터 두둑한 고료를 받고 집필을 시작한 문화계의 유망주.

모처럼 비싼 술도 한잔하고 잠자리에서 뻗었는데 웬 불한당에게 납치를 당했다.

청년
‘기분 탓이 아니었나…….’

청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흐트러진 머리가 눈을 가렸다.

최근 누군가가 자기를 따라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긴 했다.

장발을 단속하는 경찰이거나 혹은 시나리오를 사전 검열하는 정부 요원이겠거니 싶었지만 그래서 더욱 이상하다.

청년
‘머리 좀 길렀다고 사람 쥐어 팬다는 소린 듣지 못했다. 애초에 난 운동권도 아니고…….’

그때 금니가 청년의 머리채를 홱 잡아챘다.

금니
“이거, 당신이 쓴 거 맞지? 응?”

두피가 뜯길 것 같았다.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거렸지만 금니가 내민 종이 뭉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금니는 눈치가 빨랐다.

청년의 뜨악 하는 표정을 읽고 바로 심문에 들어갔다.

금니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지만. 질문은 나만 한다. 대답이나 똑바로 하라고.”

이 상황에서 주도권은 당연히 금니에게 있다.

모든 걸 백번 양보하더라도 청년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금니 말대로 대답이나 똑바로 하는 게 상황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청년
 “……알겠다.”
금니
“얘기가 통하는군. 서로 편해지고 얼마나 좋아?”

금니는 넘어진 청년을 바로 세워 주었다. 자기도 아까처럼 맞은편에 앉았다.

금니
“영화에서도 보면 엔지(N.G.) 나왔을 때 다시 찍지? 우리도 그걸 할 거야. 이번엔 한 방에 가 보자고. 레디…… 액션!”

금니는 감독 흉내를 냈다.

종이를 둘둘 말아서 마술사처럼 허공을 가볍게 두드렸다.

척!

금니
“이봐, 작가 선생. 이 애니메이션 대본…….”

금니가 상체를 앞으로 내민다.

목소리를 일부러 낮춰 가며 장난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금니
"‘로보트 태권브이’를 쓴 게, 당신 맞지?”

먼발치에 있는 드럼통의 장작불.

그 불빛이 방 안에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빛과 어둠이 청년의 얼굴을 시시각각으로 변화시켰다.

작가는 거짓말로 진실을 비춘다.

여관의 칙칙한 냄새를 맡아 가며 퀭한 눈으로 원고를 쓰고 또 쓴다.

밥을 먹을 때나 거리를 걸을 때.

심지어 여자와 잠자리를 끝내고 나서도 구상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고생한 작품이기에 자기 글을 부정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 작품을 내 것이라 우기는 게 파렴치하다는 것 또한 안다.

청년
“그래.”

청년의 부르튼 입술이 열렸다.

그는 이 야만인 같은 사내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청년
“태권브이의 원작자는 바로 나다.”
금니
“엔지! ‘나’가 선생 이름이야? 이름도 밝혀야지!”

금니가 대본을 면상에 대고 던졌다.

공들여 쓴 대본들이 파라락 소릴 내며 허공에 날렸다.

금니
“다시 큐! <로보트 태권브이>를 쓴 게 당신이야?”

싸구려 여관보다 더 암울하기 짝이 없는 공간.

그곳에서 비산하는 대본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청년
“나는…….”

수치와 분노가 머리를 지배했다.

청년은 이를 빠뜩 갈며 감정을 억눌렀다.

청년
“<로보트 태권브이>를 썼다. 내 이름은……!”

유진
“김청기 감독이요?”

유진이 자판기 버튼을 누르며 돌아보았다.

그러자 편집장이 음료수 빨리 달라고 손짓을 한다.

편집장
“마침 로봇 태권브이 40주년이잖아. 그 작품 감독 취재는 유 기자가 맡으라고. 하, 그런데 무슨 놈의 날씨가 이렇게 덥냐?”

편집장이 캔 음료를 받더니 그것으로 얼굴과 목덜미를 비벼 댔다.

2016년 초여름.

영화 잡지사 스크린의 야외 휴게실에는 매미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도로 인근가라 그런지 놈들의 울음보단 버스 경적 소리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유진
“아, 마시라고 준 걸로 뭐하는 거예요?”

유진이 질색했다.

편집장이 캔 음료를 가슴에 문질러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집장
“왜? 어차피 내 건데.”
유진
“더럽잖아요! 그거 성희롱 같은데?”
편집장
“넌 네가 여자라고 생각하냐?”

편집장은 같잖다는 듯 핀잔을 준다.

물론 유진은 어디로 보나 청량감이 느껴지는 여성이다.

짧게 커트한 단발에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쇄골.

착 달라붙은 청바지는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돋보이게 했다.

유진
“선배. 나, 그런 말 들으면 상처받는다니까.”

유진이 웃으며 담뱃갑을 꺼냈다.

사무실에서 그녀를 이성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가족이고 치열한 생존 싸움에 뛰어든 전우들.

그중에서 유진은 노련한 일등병처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편집장
“상처는 무슨. 다들 하기도 싫어하는 하리꼬미*도 앞장서서 하는 녀석이.”
유진
“그거 칭찬이죠?”
편집장
“칭찬이면 칭찬이지. 일단 체력 하나는 먹고 들어가니까.”
유진
“당연하죠. 태권도 사범도 한 몸인데.”

유진이 담뱃불을 붙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편집장은 ‘아, 그랬지.’ 하며 캔 뚜껑을 땄다.

편집장
“잘됐네, 그럼. 태권브이도 태권도 하니까 취재하기도 수월할 거야.”
유진
“그런데 저 그거 말고 딴 거 하면 안 돼요?” 그녀의 물음에 편집장이 이맛살을 구겼다.
편집장
“기어오르지 마라, 쫄따구. 그냥 해. 사람이 좀 띄워 준다 싶으면…….”
유진
“아뇨! 태권브이는 할 건데 취재 대상을 옮기면 어떻겠나 싶어서요.”
편집장
“어?”

편집장은 의아해하며 상대를 바라봤다. 유진은 입술 사이로 연기를 얕게 흘렸다.

유진
“난 영화의 주인공을 감독으로 생각하는 인간들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감독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정신은 작가에게서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거기다 김청기 감독은 그동안 매스컴을 깨나 탔다.

유진은 여러 부분을 이유로 타깃을 바꿔 보자는 얘길 하는 것이다.

편집장도 턱을 긁적였다.

편집장
“원작자를 얘기하는 거냐?”
유진
“네. 시나리오 작가인 지상학 선생을 취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편집장
“정유진!”
유진
“네?”
편집장
“쫄따구 선서!”

편집장이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유진이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유진
“아니 뭐, 무슨 말을 하려면…….”
편집장
“선서!”

끝내 유진은 한 손을 들며 기계적으로 말했다.

유진
“쫄따구는 봉이며 노예다. 선배의 존엄에 절대 도전하지 않는다.”
편집장
“잘 아네. 그런데 말이야.”

존엄을 지킨 편집장이 빈 캔을 던졌다.

퉁!

그것은 쓰레기통 가운데로 정확히 들어갔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턱을 당겼다.

편집장
“네 말 듣고 보니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해. 김 감독 인터뷰는 좀 식상할 수도 있겠고…….”
유진
“아시네.”
편집장
“대신 정말 새끈하고 따끈한 걸로 뽑아 와야 돼. 알겠냐, 쫄따구?” 편집장의 당부에 유진이 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유진
“콜!”

그때부터 유진은 인터뷰를 위한 사전 정보 조사했다.

지상학의 프로필이나 로보트 태권브이에 대한 항목 등.

워낙 유명한 내용인지라 인터넷에서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태권브이의 실존 여부를 두고 벌이는 네티즌들의 설전.

<프로도 케이: 국회의사당 돔에서 태권브이 나온다는 게 실화냐?>

<치킨 너겟99: ㅋㅋㅋㅋ우리나라 데프콘 1 발동되면 돔 열리고 태권브이 출동! 믿음?>

<오케이오케이: 제발 그런 헛소리 좀 그만. 편한 친구 구합니다. 010-6755-XXXX 연락해 주세요!>

꽤 그럴듯한 얘기를 하는 댓글도 있었다.

더군다나 추천도 무려 978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찍혀 있다.

<스피드 레건: 국회의사당 1차 설계할 때 원래 돔은 없었음. 원래는 지붕이 납작하고 긴 구조였다고 함. 그런데 청와대에서 무슨 압력이 있었는지 국회의원들이 돔 씌우라고 난리 침.>

유진
“호오?”

유진은 그 댓글을 유심히 읽어 나갔다.

스피드 레건이라는 네티즌은 꽤나 논리적인 비약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스피드 레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국회의사당 건물의 돔은 비례에 어긋날 정도로 큼. 안에 들어가면 돔부터 1층까지 뻥 뚫려있고. 비례니, 뭐니 하는 걸 알고 있는 이유도 우리 할아버지가 거기 인부로 일하셨기 때문임.>

이어지는 내용이 사뭇 심오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스피드 레건: 그분 말씀에 의하면 당시에 작업하던 건축가들도 많이 빠지고 남은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설계했다고 함. 이쯤 되면 뭔가를 숨기는 거 같지 않음?>

누군가가 스피드 레건의 글에다 댓글을 덧붙였다.

<히태: 네, 다음 망상 충.>

(*하리꼬미: 기자들의 은어. 잠복 취재를 일컫는다.)

1 초코마녀 (1화)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실존 인물, 실제 작품이라서 더 몰입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