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전에-

내가 소설이란 형식을 빌려 내 자서전을 쓰기로 했노라 계획을 밝혔을 때, 아내 경자는 자서전이 뭐냐며 일단 무식부터 과시했다. 그런 다음 그것이 돈 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행위란 판단이 서자 ‘그 영양가 없는 짓거리’의 즉각적인 철회를 엄명했다. 그리고 같은 계획을 들은 용대 삼촌은 삶은 말대가리가 다 웃을 일이라며 말처럼 웃어대더니, 한때 정치판에 몸담았던 전력의 소유자답게 그거 써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라도 할’ 참이냐며 가가대소를 금치 않았다. 아마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내 어머닌 ‘미친놈’이란 한마디로 내 입을 틀어막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고.

사실 내가 지금 자서전 운운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겨우 사십을 넘긴 나이에다, 그렇다고 이름 앞에 얹을 그럴듯한 직함 한번 꿰차본 적이 없는 터수에 자서전이라니. 가위 용대 삼촌 말이 아니라도 삶은 말대가리가 웃을 일일 수밖에.

그럼에도 나는 내 자서전을 쓸 것이고 또 꼭 써야한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 이유는 자서전 말미에서 밝힐 것이다. 순서대로 하자면 그 이유를 당연히 먼저 밝혀야 하겠지만, 이 자서전을 읽는 독자들이 그 이유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에서 역순의 구성을 취하고자 한다.

그럼 머리글은 이쯤에서 접고 이제 본격적인 쓰기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아, 그러기 전에 후일 이 자서전을 손에 잡을 독자들에게 미리 한마디. 혹시라도 ‘나이 마흔밖에 안된 놈이 쓴 자서전이란 것에 무슨 얘기가 얼마나 담겼겠으며, 담겼다한들 무슨 의미 무슨 재미가 얼마나 있으랴’ 하는 우려는 부디 하지 마시길. 그 지점에 자신이 없다면 지금 이 어정쩡한 나이에 자서전을 쓴답시고 감히 엄두를 내겠는가. 모쪼록 그런 염려는 접어두시고, 지금부터 펼쳐질 이 김범수란 사내의 사십여 년에 걸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영광과 오욕의 기록에 눈 기울여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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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쓰기 전에.

제 1장. 1961년 5월 16일.

제 2장. 파랑새를 보다.

제 3장. 이별가.

제 4장. 럼주(酒)를 마시다.

제 5장. 재회.

제 6장. 자명고를 찢다.

제 7장. 질투를 노래하라, 시(詩)의 여신이여!

제 8장. 남해(南海), 그 바다에 묻다.

제 9장. 슬픈 큐브 맞추기.

제 10장. 농약과 쥐약 사이, 혹은 우연과 필연 사이.

제 11장. 비탈에 선 나무들.

제 12장. 1999년 12월 31일.

§ 쓰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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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961년 5월 16일-

........ 그러길 얼마 후, 조산소 산파는 다 돌팔이라는 산파답지 않은 어머니의 신념에 의거, 나는 이웃의 조산소를 제쳐두고 조산원집 아들답지 않게 정식 산부인과에서 마침내 세상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그 첫 대면에서, 나는 이층 산부인과 목조건물 창문 너머로 캐터필러 굉음도 요란하게 시가지를 질주해가는 탱크며 장갑차의 행렬을 목격했다.

그날은 1961년 5월 1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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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매, 나는 출생의 순간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백마의 하례를 받으며 알을 깨고 나왔다거나, 갑옷에서 투구까지 완전 무장한 채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오거나 했다는 건 물론 아니다. 또한 내가 태어나던 시간에 천상의 나팔 소리와 함께 꽃비가 내렸다거나,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붉은 혜성이 은하수를 가로질러 자미궁을 범했다거나 하는 조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평범한 여인네의 몸을 통해 장씨네 셋째 아들, 이씨네 넷째 딸처럼 익은 대추 한 알이 떨어지듯 그렇게 싱겁고도 멋대가리 없이 이 땅에 떨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 탄생의 순간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던 바로 그날 나와 함께 태어난 역사적인 한 사건, 이 나라의 운명에 있어 어둠이자 빛이요, 혼돈이자 질서이며, 반역이자 충정이었던 역사적인 한 사건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사십여 년 전의 초여름 어느 새벽, 평소 검은 선글라스 쓰기를 좋아하던 장군 하나가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군대를 앞세우고 별 두 개를 번쩍대며 한강 다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간, 나는 내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 아직은 미숙한 팔 다리를 팔랑개비처럼 휘두르며 양수(羊水)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 후면 십 개월에 걸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어머니의 자궁을 열어젖히고 한 우주의 탄생을 만방에 알리는 고고성을 터트릴 터였다.

그 가슴 떨리는 흥분과 긴장의 순간, 무사히 양수의 바다를 건너 세상을 향한 마지막 관문 앞에 도달한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힘을 모았다. 동시에 우렁찬 고고성을 위해 목청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세상으로 통하는 출구를 향해 뜸베질하는 황소처럼 머리통을 앞세우고 맹렬하게 돌진했다.

쿵! 출구를 들이받는 머리통에 깨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때 이미 충분히 조숙해 있던 나는, 어느 서양 소설에 나오는 양철북 치는 아이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조숙했던 나는 알고 있었다. 무릇 모든 해탈에는 아픔이 따르는 법이라는 것을. 알을 깨는 아픔이 없이는 비상(飛上)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현기증을 동반한 통증을 꾹 참아가며 용맹정진을 계속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머리로 출구를 들이받을 때마다 잘 여문 종소리가 났다. 열려라 참깨, 뗑그렁! 열려라 들깨, 뗑그렁! 열려라 홍두깨, 뗑그렁!

종소리는 내 귓바퀴를 감아 돌아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렇게 퍼져나간 종소리는 암구렁이한테 물려죽게 생긴 치악산 선비부터 우선 살린 다음, 이어 부지런히 여기저기를 돌며 성북동 비둘기도 깨우고, 새벽 예불을 놓친 게으른 늙은 중도 깨우고, 안 깨워도 좋을 검은 날개의 잠의 여신까지 깨우더니 이윽고는 내 어머니 신영순 여사, 그때까지 새벽잠에 잠겨 있던 내 어머니 신영순 여사를 깨우기에 이르렀다.

종소리에 잠에서 깬 내 어머니는 노련한 산파답게..., 가만! 그러고 보니 여기서 먼저 내 어머니에 대한 소개부터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만고 이래 뿌리 없는 가지가 없고 샘 없는 물이 없거늘, 동방예의지국의 서릿발 같은 삼강오륜을 물려받은 몸으로 내 어찌 근본을 젖혀둔 채 지엽부터 운위할 수 있으랴. 해서 이제라도 범절에 맞게 근본부터 소개해 올리자면, 내 어머니 신영순 여사는 무허가 조산소의 산파였다. 용가리 통뼈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뼈대 있는 반가(班家)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그윽하고, 자태가 조신하고, 용모가 수려했다. 그랬던 어머니가 반가의 여식답지 않게 조산소 산파가 되기까지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는데...,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 굳이 어머니에 대한 소개를 앞세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가지를 보면 그 뿌리의 허실을 짐작할 수 있고 물을 보면 그 샘의 청탁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조금 전까지 나는 내 출생의 예사롭지 않음에 대해 애기하고 있지 않았던가. 장황한 말에는 뜻이 박약하고, 분주한 글에는 방향이 모호한 법. 그렇다면 이야기의 일관성을 위해서라도 어머니의 소개는 조산소 산파였단 정도에서 일단 그치기로 하자. 내 어머니 신영순 여사에 대해 말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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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소리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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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이클버디 (1화)
기대감에
1 송강 (1화)
지난해 바쁜 일상을 보내고 금년도 무술년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시작하며~~. 이종욱 작가님의 소설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