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갈린 까만 원두가루 위로 뜨거운 물줄기가 원을 그리며 떨어지고 김이 피어올랐다. 포슬포슬한 가루들이 촉촉하게 젖어들면서 깔때기 아래로 내려온 검은 액체가 투명한 용기 안에 서서히 차오르더니 그와 더불어 은은하게 퍼지는 원두향이 오피스텔 주방의 공기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냄새 좋다 단군아.”

“좋아?”

원두향이 그새 거실까지 날아갔는지 기분 좋은 공기에 어울리는 통통 튀는 여자 목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어, 좋아.”

투명한 커피보트를 빼내 들어 하얀 잔에 검은 액체를 따르던 단군이 웃었다. 쌍꺼풀 없는 큰 눈에 높고 날렵한 콧대, 날카로운 턱 선의 옆모습이 자칫 차가워 보일 인상이었지만 웃으면서 살짝 파인 보조개와 자연스럽게 휘어진 눈매가 부드러운 남성의 이미지로 바꿔줬다. 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지는 남자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커피 잔 손잡이를 양손에 각각 쥐고 들어올렸다.

단군이 주방을 빠져나와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았다.

[“이 화재로 소방서 추산 이천만원의 재산 피해와...”]

화재 관련 보도가 한창인 TV에서 앵커의 일률적인 음성이 흘러나왔으나 가볍게 유리끼리 부딪치는 소리에 곧 묻혔다.

“연습하자.”

두꺼운 테이블유리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은 단군의 목소리는 그가 짓는 부드러운 미소보다 더 부드러웠다.

“......”

상대가 반응이 없자 단군은 시크한 생김새와는 달리 귀엽게 졸라댔다.

“지금 하자, 응? TV 그만보고 나 봐라 자기야~.”

-전단군. 나는 대한민국 형사고 신체 건강한 남자, 사람이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이 존재는 내 여자 친구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TV를 보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새까만 눈동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뽀얀 볼 위로 길게 드리워지는 속눈썹의 그림자.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슬에 젖은 한 떨기 장미를 포개놓은 듯 붉은 윤기마저 감도는 입술까지... 한마디로 고혹적인 모습을 한 그녀에게 단군은 천천히 다가갔다.

“단군이 너가 그랬잖아, 나 이제 잘한다고. 그럼 연습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그래, 너 잘해. 근데 한 가지, 집중력이 부족해. 난 너랑 하면서 너만 생각하는데 넌 딴 생각 하잖아. 예전 같지 않잖아. 그래서 연습해야 돼, 계속 해야 돼.”

“난 잘 모르겠는데. 정말 내가 그랬어?”

말할 때 앙증맞게 움직이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은 체리와도 같다. 살짝만 머금어도 그 상큼한 향을 느낄 수 있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터지는 과즙의 달콤한 향연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단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삼켜버렸다. 여자의 작은 얼굴을 커다란 양손으로 감싸 고개를 젖히게 하고 위에서 입술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그는 눈을 감고 점차적으로 환상적인 키스에 빠져갔다.

[“가게주인 70대 이모씨는 중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중입니다. 가게 안 설치된 CCTV로 파악한 강도 용의자는 총 다섯 명으로...”]

TV에서 흘러나오는 취재기자의 딱딱한 보도는 불청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드라웠던 여자의 입술이 멀어졌고 단군의 반듯한 흰 이마에 힘줄이 불뚝 솟으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이봐, 이봐.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래도 몰라? 나한테 집중 안 하니까 변했잖아, 이 짐승. 너 정말 이러기야 나호랑?”

-나호랑. 얘도 형사고 신체 건강한 여자, 짐승이다. 뭐? 말실수했냐고? 아니면 미쳤냐고?

고개를 좌우로 저은 단군이 바라본 곳엔 좀 전까지 있었던 귀여운 여성 대신 푸른빛에 둘러싸인 이물(異物)이 TV를 보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넓은 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은백색으로 반짝였고 손가락에서 길게 자라난 손톱이 날카로웠다.

“나호랑, 화 가라앉히고 나 봐.”

새빨간 핏빛입술사이 예리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호랑이 고개를 돌려 서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지중해 바다를 그대로 퍼 담은 듯 코발트 블루빛깔의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백호. 신수(神獸)로 변한 호랑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물건만 훔친 게 아니라 사람도 다치게 했어. 힘없는 노인인데... 저런 놈들은 다 잡아 처넣어야해.”

“물론 처넣어야해. 우리 말고 그쪽 형사들이. 저긴 우리 관할 아니니깐 너는 그만 돌아오자 호랑아.”

무방비 상태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과의 맞대면. 보통 사람 같았으면 기절을 해도 벌써 했거나 죽어라 도망갔으리라. 하지만 이 상황이 익숙한 단군은 대수롭지 않게 소파에서 일어나 호랑에게 걸어갔다.

-나호랑. 이름 한번 기막히게 짓지 않았는가? 직접 봐서 알겠지만 내 여자 친구 호랑은 진짜 호랑이다. 멀쩡한 사람으로 있다가 순식간에 백호가 되는데 주로 감정이 고조될 때, 특히 지금처럼 화를 내거나 공격성향을 띠면 변해버린다. 그리고 어찌하다보니...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는 사람도 아닌 이 짐승과 사랑에 빠졌다. 또 조금 억울하지만 분명 내가 훨씬 깊이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 아직 사랑이 뭔지도 확실히 모르는 이 짐승을 언제 가르쳐 제대로 연애를 하느냐가 내 인생 최대 목표가 되었으니 말이다.

단군이 한손으로 호랑의 허리를 감아 당기고 다른 손으로 은빛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어 내리다가 꼭 끌어안았다. 단군의 가슴이 호랑의 왼쪽 가슴윗부분을 닿아 누르자 그 주위로 하얀 빛이 발하면서 다시 처음 보았던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군은 호랑의 검은 머릿결에 긴 손가락을 넣어 빗어 내리며 새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누가 내 밥그릇에 손대는 거 싫거든. 안 그래? 그니까 저 사건은 저쪽에서 알아 하는 거고 우리는 하던 연습을 마저 하는 거고. 그래, 안 그래?”

“그래.”

제 가슴에 귀여운 턱을 찍고 위로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호랑의 미소가 눈부셨다. 커다란 두 눈이 귀엽게 반달로 접혔고 뽀얀 얼굴에 핀 선홍빛 홍조와 더불어 살며시 벌어진 탐스런 입술은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한껏 달뜬 단군은 방금 전 아쉽게 놓쳤던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이 절실해져 고개 숙여 호랑의 입술로 내려갔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다... 하지만 기대하던 향긋한 입술에 닿은 순간 눈치 없이 들리는 휴대폰 벨소리가 산통을 깨버렸다. 그리고 한번 더 아니나 다를까, 그를 저지하려 울려 퍼진 방해에 의해 향기로웠던 촉촉한 입술이 달아나 쫑알거렸다.

“전화 왔어 단군아. 안 받아?”

“안 받아.”

남자에겐 오로지 감칠맛 있게 닿았다 스치며 돌아간 입술만이 관심대상이었다. 폰 벨이 아니라 화재 벨이 울려도 멈출 생각 없는 단군은 탁자 위에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는 호랑의 턱을 잡아 돌렸다. 이윽고 NO 라는 의사를 못 박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뜨거운 키스로 못을 박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듯 일방적이고도 정열적인 키스세례를 퍼붓는 동안 또 다른 벨소리가 울려나왔다. 애타게 갈구하는 남자의 욕망을 알리가 없는 호랑은 눈만 겨우 돌려 테이블위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두 휴대폰을 보다가 안 되겠는지 단군을 억지로 밀어냈다.

“전화 받자. 우리 둘 다 찾는 거면 사건 터졌단 말이잖아.”

“그래서 안 받는 거야. 우리가 얼마 만에 얻어낸 비번인데. 난 못 가, 너도 못 가고. 있는 인력으로 수사하라 그래.”

“나는 안 그럴래.”

옆으로 쏙 빠져나간 호랑이 시끄럽게 우는 휴대폰을 들어 받고 잠시 통화 후 돌아섰다.

“가자 단군아. 이제 우리 밥그릇으로 넘어왔어. 그 다섯 놈들 청담 쪽에서 인질극 벌이고 있대.”

“그 도둑놈들 진심 맘에 안 드네. 왜 옮겨 다니면서 미친 짓들을 하지?”

서둘러 나갈 생각은 않고 시무룩해 퉁퉁대는 단군을 보며 곤란해진 호랑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그리곤 금세 떠올렸다, 틈만 나면 딱 달라붙어 집에 안 가면 안 되냐고 칭얼대던 단군을. 거기서 힌트를 얻은 호랑이 나름 묘안이라 판단한 방법을 당당하게 제시했다.

“도둑놈들 잡으면 너랑 여기서 밤새 놀아 줄게.”

피융-. 카운트다운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을 마치자마자 흡사 발사된 로켓을 본 착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테이블 위 휴대폰과 자동차 키홀더가 사라지고 단군도 사라졌다. 예상은 했지만 무섭도록 즉각적인 반응에 당황해 잠시 멍했던 호랑이 정신을 차려 활짝 열린 문으로 뛰어나갔고 천천히 닫힌 문에서 삐리릭 잠금 소리가 났다.

주차장으로 뛰어오는 호랑을 본 단군이 차량 운전석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빨리 타, 시간 없어.”

호랑이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와 앉자 단군은 운전대 옆에 차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밤새 나랑 있기로 분명히 약속했다. 중간에 안 할래, 갈래해도 소용없어. 너 꽉 붙들고 집에 안 보낼 거니까.”

“응. 내가 한 말은 지켜. 넌 걱정하지 말고 출발이나 해.”

“난 니 걱정하는 거야.”

“내 걱정?”

안전띠를 당겨 철컥 채워준 단군이 갸우뚱해 톡 튀어나온 호랑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예쁜 짐승 같으니. 남자랑 같이 밤을 보내겠단 말이 무슨 뜻인지 내가 자세히 가르쳐줄게.”

“내가 뭘 몰라? 같이 영화 보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얘기하고 노는 거 아냐? 딴 게 또 있어?”

“있어. 기대해.”

뭐가 더 있단 건지 전혀 감이 안 와 어리둥절해 하는 호랑과 달리 기합이 잔뜩 들어간 단군은 경광등을 찾아 창문 밖으로 꺼내 차 지붕 위에 올렸다.

“우선 도둑놈들부터 수거하러 가볼까, 나형사?”

“응. 싹 다 잡아들이자 단군아.”

“물론. 감히 겁을 상실해도 정도껏 해야지 어디 우리 구역에 얼굴을 들이밀어? 다 죽었어.”

웽웽.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는 빨간 경광등이 번쩍이고 출동 차량이 속도를 높여 도로를 시원하게 미끄러져 달려갔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똑같은 표정을 짓는 단군과 호랑의 웃는 얼굴이 차창 앞 유리 너머로 환하게 빛나 보였다.

-나와 내 사랑스런 여자 친구가 같이 지켜나가는 우리들 구역, 사람과 신수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세상. 그 속사정이 조금 더 궁금한 당신에게 열어드립니다. 판타지가 섞인 공간. 어쩌면 현실보다 더 현실일수도 아니면 단지 환상일수도 있는 세계. 어서 오세요, 여기부터는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