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시만드로스는 기원전 610년경 태어난 인류 최초의 천문학자이자, 그리스 철학자였어요. 그는 다윈보다 이천 사백 년이나 앞서 인류의 진화에 관해서 이야기했죠. 그의 진화론은 현대 학자들에게 수생유인원설(水生類人猿說)의 근간을 마련해 주었는데, 물고기의 진화로 인간을 비롯한 육지 동물이 탄생했음을 주장한 내용이었어요. 아낙시만드로스는 실제로 인어가 존재했었고 인간들 앞에 자주 그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죠.”

2025년, 겨울, 어느 대학의 어두운 강의실 스크린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배경으로 토론 중인 학자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보여지고 있다.

진지한 표정으로 강연 중인 아라온의 나이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지만, 대략 이십 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아라온이 프로젝터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면, 스크린에 인어 문양이 새겨진 동전이 보인다.

“인어의 기록은 기원전 이천 년경 페니키아 동전에 새겨진 인어 문양의 발견과 더불어서 동서양의 각종 신화와 설화 속에서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해 왔어요.”

“실제로 인어가 있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한 여학생이 아라온에게 물었다.

“저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주장이 근거 없는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모두는 바닷물과 똑같은

성분의 양수 속에서 자라 태어났죠. 인간은 수정란일 때 99%, 막 태어났을 때는 90%, 그리고 완전히 성장하면 70%가 물로 되어있어요.”

아라온이 다시 리모컨 버튼을 누르면, 스크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 위로 보석처럼 눈부신 은빛 결정 사진이 보인다.

“이 사진은 에모토 마사루라는 일본 학자가 물도 의식이 있다고 믿고 찍은 사진인데, 세계 각국의 사랑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물의 결정 사진이에요. 아름다운 모습이죠……. 다음은 미움, 증오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물의 결정 사진이에요.”

스크린에서는 마치 구정물이 번진 것 같은 흉측한 모습의 검은색 결정 사진이 보여진다. 아라온이 다시 리모컨 버튼을 누르면, 스크린에는 영롱한 노란빛이 감도는 신비로운 모양의 결정 사진이 이어졌다.

“이 건 제가 찍은 사진인데, 죄책감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물의 결정 사진이에요. 역시 아름다운 모습이죠……. 그런데 왜 죄책감의 결정 사진은 사랑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가졌을까요?”

랑간이 어두운 강의실 한쪽 구석에서 가죽 롱코트 안에 입은 후드 점퍼의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앉아 있었다. 그녀 역시 정확히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삼십 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그녀 앞에 놓여 있던 물잔 안에 담긴 투명한 물이 스스로 미세하게 불규칙한 파동을 만들면, 그 파동을 본 랑간이 불길한 예감을 안고 강의실을 조용히 빠져나간다.

어두운 골목에 다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한 여자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눈동자 가장자리에 원형의 주황색 띠가 둘려 있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한 남자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의 하얀 목을 송곳니로 물고 흡혈하면, 다른 남자들도 송곳니를 내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 모두 검은색인 타이트한 옷차림에 가죽 롱코트를 걸친 랑간이 검은 마스크와 후드 점퍼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다가와서 양손에 쥔 ‘UV 수리검(手裏剣)’으로 뱀파이어들을 공격한다. 은으로 만들어진 ‘UV 수리검’ 양날에는 보라색 자외선(UV)이 흐르고 있고, 뱀파이어들의 몸에 그 검이 스칠 때마다 그들의 살이 타들어 간다.

뱀파이어들도 품속에서 전류가 흐르는 티타늄 단검을 꺼내 들고, 비호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랑간을 공격한다. 하지만 그들은 랑간의 전광석화보다 빠른 몸놀림과 ‘UV 수리검’을 당해내지 못했다.

뱀파이어들은 결국 그녀의 검에 베이고, 찔려서 온몸이 타들어 가 모두 하얀 재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골목 한쪽에서 수려한 외모에 세련된 정장 차림의 서율이 권총의 총구를 랑간에게 겨누었다. 그 순간, 랑간이 허벅지에 차고 있던 권총을 재빠르게 손에 쥐고 서율을 향해 은 탄환을 쏟아 냈다.

서율 또한 비호같은 움직임으로 랑간의 탄환을 피하면서 푸른빛의 탄환을 쏟아 냈다. 그때 뒤에서 나타난 정장 차림의 아도 역시 랑간을 향해 총을 쏜다.

랑간이 전광석화보다 빠른 몸놀림으로 서율과 아도의 푸른 탄환을 피하다가 마치 돌고래처럼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그 순간, 공중에서 고압 전류가 흐르는 전기 그물이 내려와 그녀를 덮친다.

그와 동시에 주변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이 스스로 파동을 일으키며 빠르게 랑간을 향해 모여든다. 그렇게 그녀에게 모여든 물이 전기 그물의 고압 전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감전의 고통에 전율하던 랑간이 결국 의식을 잃는다.

아도와 서율이 그물에 잡힌 랑간을 향해 다가왔다. 이들 역시 눈동자 가장자리에 원형의 주황색 띠와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뱀파이어들이다.

배와 흡사한 유선형 디자인의 거대한 건물 입구에는 인어 문양이 새겨진 원형의 커다란 나무 간판 가운데 글로벌 제약회사 ‘Eternal Life’의 로고 ‘EL’이 찍혀있다. 그 건물 지하에 있는 ‘메모리 저장소’의 철제 베드 위에는,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랑간의 양손과 양발이 티타늄 고리에 묶여있다.

“랑간의 기억으로 들어가면 정말 태자님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도가 서율에게 물었다.

“내가 분명히 보았다. 랑간이 태자님을 데려가는 것을.”

아도가 신중하게 대답하고 게걸스럽게 햄버거를 먹고 있는 털보를 바라보았다.

메모리 저장소의 연구원 털보가 햄버거를 다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메모리 용량이 얼마나 필요하려나……. 저 여자 얼굴을 봐야 몇 년 정도에 메모리가 필요한지 알 수 있을 텐데…….”

털보가 랑간의 얼굴에 있는 검은색 마스크를 벗기려 하자, 아도가 냉랭하게 말한다.

“저 여자 얼굴을 보면, 네게도 어떤 저주가 내릴지 모른다.”

“아……. 그럼 안 보는 게 낫겠죠? 보조 기억저장 장치도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예요.”

털보가 아도의 서슬 퍼런 눈빛을 피하며 스위치를 누르면, 랑간이 누워있는 베드가 마치 자기공명영상장치처럼 생긴 원형의 기구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기억나는가? 우리가 처음 어해금을 가졌던 날을?”

아도가 물었다.

“어찌 있을 수 있겠나……. 붉은 상현달이 떠 있던 그 검은 밤바다를…….”

-1-

1401년(태종 1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지 구 년이 지나는 동안, 조정을 위협하던 고려 왕 씨들을 섬으로 유배를 보내 모두 수장시킨 후, 그들이 연루된 모반은 잦아들었지만, 일본 해적, 왜구(倭寇)의 노략질은 끊이질 않았다.

붉은 상현달 아래, 대마도 부근의 검푸른 바다 위에서는 나룻배 모양의 긴 목선이 일본 해적, 왜구(倭寇)의 대선, 아타케부네(安宅船)를 향해 조용히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목선에는 남루한 조끼 차림 사이로 오랜 시간 무예를 연마한 듯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달빛에 드러내고 있는 옥파고(玉波高)가 선수에 우뚝 서 있고, 노를 저을 때마다 단단한 팔뚝 위로 푸른 심줄이 돋아나고 있는 그의 부하들, 아도, 서율, 허검, 염선길 등과 함께 다른 다섯 명의 무사들이 타고 있다.

허리에 환도(還刀)를 차고 있는 옥파고는 강단 어린 눈빛이 선명하고, 육척장신에 털북숭이 염선길은 커다란 도끼를 옆에 두고 있다. 그리고 매서운 눈매를 가진 아도는 쌍검을 등에 차고 있고, 편전(片箭:애기살)이 가득 담긴 활 통과 활을 등에 멘 서율은 침착한 눈빛을 가졌다. 거기에 작은 키에 날렵하게 보이는 허검은, 양 허리춤에 수리검(手裏剣)을 꽂고 있다. 이들이 조용히 몸을 움직여 아타케부네(安宅船) 갑판 위로 올라갔다.

옥파고가 갑판 한쪽 구석에 숨어 누각(樓閣)을 바라보았다. 백 명 이상이 승선할 수 있는 배 최상단에 있는 누각(樓閣)에는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는 애꾸눈 선장, 모리 테루모토가 남자 기모노인 유카타 차림에 칼날의 길이가 오 척이나 되는 쌍수도(雙手刀)를 허리에 차고 상석에 앉아 있다.

애꾸눈 선장, 모리가 인어 문양이 조각된 어해금(漁奚琴)과 그것을 켜는 활대를 한쪽 눈으로 유심히 살폈다. 그 옆에는 일본 전통 팬티인 훈토시 차림에 왜검(倭劍)을 허리에 찬 채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부하가, 일본 무사의 상투인 촌마게를 한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조선의 귀족에게 약탈한 어해금 이옵니다.”

“어해금?”

모리가 한쪽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인어에게 최면을 걸어 부르는 신비한 해금이라 하옵니다.”

“그럼 이것으로 인어를 잡을 수 있는 것이냐?”

“어해금을 연주할 수 있는 악보는 따로 있다 들었습니다.”

“그 악보는?”

“멸망한 고려 왕족의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긴 모리의 어깨 위에 그의 매서운 눈빛을 닮은 매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그 매를 쓰다듬어 주던 모리가 여전히 머리를 조아리며 기다리고 있는 부하를 내려 보았다.

“너는 우리 본토에 전해져 오는 팔백비구니 전설을 믿느냐?”

“인어고기를 먹고 인어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 팔백 년을 산 비구니 여인을 보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솔깃한 이야기는 남자가 인어 꼬리 살을 회로 먹으면 인어 꼬리처럼 괴력이 생기고, 그것을 삶아 국물을 내어 마시면 모든 병이 단숨에 치유된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단한 건, 인어 심장을 먹은 자는 영험한 힘을 얻는다 들었습니다.”

부하의 말에 귀가 솔깃한 모리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영험한 힘?”

“인어 심장을 먹은 자는 물을 뜻대로 움직이고,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다 들었습니다.”

그 영험한 힘을 얻으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던 모리의 입가에 왠지 섬뜩한 미소가 어렸다. 부하에게 가보라며 가볍게 손짓 한 모리가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앉아 있던 그가 옷소매에서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는 은비녀를 꺼내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모리의 모습을 갑판 한쪽 구석에 숨어 바라보던 파고가 부하들에게 눈짓하고 일어나서 수십 명의 일본 해적들과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파고는 자신의 환도로 일 획에 한 명씩 해적들을 베어 나갔고, 염선길은 도끼로 해적들의 머리를 부쉈다. 그리고 어느새 돛대 위로 올라가 있는 서율은 편전을 쏘아 해적들을 죽여 나갔고, 아도는 양손에 든 쌍검을 비호처럼 휘둘렀다. 다른 한쪽에서는 허검이 해적의 긴 칼을 짧은 수리검으로 막고, 재빠르게 뒤로 가서 목을 그어버리고는, 그 수리검을 다른 해적의 이마에 던져 꽂았다. 하지만 파고의 다른 부하들은 수적 열세에 밀려 하나둘씩 죽어 나간다.

이 광경을 상단의 누각에 앉아서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던 모리 앞에 피 묻은 환도를 손에 쥐고 있는 파고가 다가왔다.

쌍수도의 모리와 환도의 파고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모리의 검술이 파고보다 한 수 위로 보이는데, 그의 옷소매에서 은비녀가 떨어졌다. 자신의 발아래까지 굴러온 은비녀를 주운 파고를 향해 모리가 일갈했다.

“그 은비녀를 내놓지 않으면, 너에 사지를 모조리 잘라 버릴 것이다.”

“어해금을 내게 주면, 이 은비녀를 돌려주마.”

모리의 명을 받은 부하가 파고에게 어해금과 활대를 건넸다. 그것을 받은 파고가 모리의 부하에게 은비녀를 건네는 척하다가 그대로 바다를 향해 뛰어드는 순간, 모리의 쌍수도가 그의 한쪽 다리를 단칼에 잘라 버렸다.

파고가 허공에 붉은 피를 쏟아 내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염선길, 아도, 서율, 허검 또한 파고를 따라서 모두 바다로 뛰어들었다.

“저들을 잡아라!”

모리가 부하들에게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십 명의 해적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모리가 천리경을 손에 쥐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천리경의 원형 속에는, 어해금과 활대가 놓여 있는 목선을 염선길, 아도, 서율, 허검이 힘껏 노를 저으며 멀어져 가고 있는 모습과 함께 한쪽 다리가 잘려나가 고통스러워하는 파고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모리가 갑판 바닥에서 아직도 붉은 피를 쏟아 내는 잘린 다리를 주워들고 허공으로 던졌다. 그러면 그의 매가 파고의 잘린 다리를 허공에서 발톱으로 낚아채고는, 갑판 구석에 내려앉아 날카로운 부리로 다리 살을 콕콕 찍으며 뜯어먹었다.

십 년 후.

어깨가 훤히 드러난, 조선 시대 해녀의 작업복인 하얀 물소중기 차림의 랑간이 한 손에 망사리와 테왁을 들고 해맑은 미소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뻐드렁니에 곰보투성이 얼굴의 랑간은 누가 보아도 추녀 중의 추녀이지만,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선한 눈빛과 해맑은 미소 속에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바다님! 오늘도 안녕하시지요? 소녀가 우리 고을 사또님께 진상 올릴 전복이랑 소라랑 조금만 나누어 갖겠습니다. 엄마와도 같은 바다님. 부디, 이 소녀를 보살펴주셔요.”

랑간이 바다를 향해 두 손을 합장하며 기도드렸다.

훤히 드러난 왼쪽 가슴 위로 노비의 표식인 ‘婢(비)’자가 새겨져 있는 랑간이 소라로 만든 악기인 나각을 여러 차례 힘껏 불었다. 그리고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가만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나각 소리를 듣고 온 돌고래가 신이 난 듯 수면 위로 힘차게 튀어 올랐다. 랑간이 그 광경을 보며 환한 웃음을 짓고는 다시 나각을 힘껏 소리 내어 불었다.

바닷속에서 전복을 캐던 랑간에게 여인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신비한 해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미끈한 돌고래 한 마리가 해금 소리에 이끌리듯 그 소리를 향해 빠르게 헤엄쳐 가면서 랑간 옆을 스쳤다. 그 순간, 랑간이 재빠르게 그 돌고래의 등지느러미를 잡고 함께 헤엄쳐 갔다.

바닷속에는 물결에 일렁거리는 붉은 한복에 여러 개의 무거운 추를 단 아름다운 여인이 바닥에 정좌해 앉아서 인어 문양이 새겨진 어해금(漁奚琴)을 구슬픈 선율로 연주하고 있었다.

랑간은 그 여인이 수면 위에 있는 배와 연결된 긴 대나무 숨통을 이용해 숨을 쉬며 연주하고 있는, 환상과도 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여인의 주변으로 모여든 돌고래와 각종 물고기가 마치 해금 연주를 감상이라도 하는 듯 여겨졌다. 그러다가 무언가에 위협을 느낀 듯 일순간, 모두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톱니와 같은 이빨이 달린 아귀 모습의 거대한 심해어가 빠르게 헤엄쳐 와서 그 붉은 한복 여인의 얼굴 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몸길이가 팔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심해어를 마주한 여인의 얼굴에 서늘한 공포가 스며들며 그 고운 선율이 흐트러지자마자, 심해어가 거대한 입을 벌려 여인의 상반신을 단번에 물어버렸다.

심해어의 입에 상반신이 물린 채 발버둥 치는 여인에게서 붉은 핏물이 쏟아져 마치 잉크처럼 물결 속으로 번져나갔다.

그러는 동안, 여인이 양손에 꼭 쥐고 있던 어해금과 활대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수중 밑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 모든 광경을 보며 마치 쇳덩이처럼 굳어 있던 랑간이 수중 속에서 자신을 향해 천천히 내려와 마치 운명처럼 그대로 양손에 쥐어지는 어해금과 활대를 잡으면, 그제야 저렸던 오금이 풀리면서 수면 위로 허겁지겁 헤엄쳐 나왔다.

배 위에서 작살을 들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닷속을 유심히 살피는 인어 사냥꾼 중에는, 외나무다리 선장, 옥파고와 그의 부하들, 염선길, 아도, 서율, 허검이 보였다. 이들은 모두 예전처럼 남루한 조끼 사이로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드러내고 있다.

숨죽인 채 바닷속을 살피던 파고가 순간, 배 밑으로 빠르게 헤엄쳐 지나가는 주황빛 인어의 모습을 보자마자 배에 묶여있는 밧줄과 연결된 작살을 힘껏 던졌다!

그 작살이 수중의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헤엄치는 인어의 등에 그대로 꽂혔다!

인어가 지르는 고음의 외마디 비명에 모두가 경악하며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 순간,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인어가 자신의 꼬리로 바닷속에 잠겨 있는 배의 밑면을 후려치면, 그 배가 인어 꼬리의 괴력에 두 동강이 나며 부서졌다!

작살을 손에 쥐고 있는 파고와 그의 부하들이 모두 부서진 배 위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인어를 쫓기 시작했다!

빠르게 헤엄치는 인어 등에 꽂혀있는 작살과 연결된 밧줄이 부서진 배 위에서 순식간에 모두 풀어져 팽팽해지자마자, 그 부서진 배가 인어의 괴력에 이끌려 바닷물 속을 가르며 갔다.

곧이어 그 부서진 배를 끌고 가던 팽팽한 밧줄이 다시 들려오는 인어의 비명과 함께 마치 뱀처럼 흐느적거리며 수중 속으로 가라앉았다.

등에 꽂혀있는 작살이 빠져나간 인어가 어디론가 쏜살같이 헤엄쳐 사라지는 모습을 본 파고가 쫓는 것을 멈추고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어해금을 찾아라! 그래야 다시 인어를 부를 수 있다!”

망사리에 인어 문양이 새겨진 어해금과 활대를 넣고 육지로 올라온 랑간이 작은 배를 끌고 고기 잡으러 나가려는 두 어부를 보고 멈칫하며,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어부들은 랑간을 보자마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동시에 바닥에 침을 탁! 탁! 뱉으며 인상을 구겼다.

“저거 진수 딸 랑간 아닌가?”

“이런 젠장맞을, 오늘 고기 잡으러 나가기는 다 틀렸구먼.”

한 어부가 랑간을 책망하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고는 손에 들었던 노를 배 위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다른 어부가 맞장구를 쳤다.

“최 생원네 노비가 저년 얼굴 보고 바다로 나갔다가 재수가 옴 붙어 죽었다며?”

“말도 말아. 그런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저년 얼굴 보고 벼락 맞아 죽은 동삼이는 어쩌고.”

랑간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구멍 난 박 껍질을 주워들고 얼굴을 가렸다.

한 어부가 박 껍질을 쓴 랑간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보며 조롱을 이어갔다.

“우리 용왕님은 왜 저런 년을 안 잡아가시나 몰라.”

이때,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부가 누군가를 보고 움찔하며 뒷걸음을 쳤다.

“오늘 고기잡이는 글렀으니 주막으로 가서 술이나 푸세.”

두 어부가 도망치듯 종종걸음으로 가는 모습을, 랑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았다.

랑간의 아버지, 진수가 물고기가 가득 담긴 망태를 어깨에 멘 채, 박 껍질을 쓰고 있는 딸 뒤에 멈춰 섰다. 그는 건장한 체구에 험악한 인상을 가졌지만, 딸을 볼 때만큼은 언제나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박 껍질은 왜 쓰고 있는 게냐?”

“사람들이 저 때문에 재수가 없다 하는데, 이거라도 써서 사람들 액을 막아야 할 것 같아서요.”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는 랑간이 쓰고 있는 박 껍질을, 측은한 심정의 진수가 벗겨주었다.

“마음으로 보아 어여쁜 것이 진짜 예쁜 것이다. 사람들 말에 너무 괘념치 말아라.”

순간, 바닷속에서의 일이 불현듯 생각난 랑간이 손짓까지 더하며 두서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제가 물질을 하러 나갔다가 바닷속에서 이따 만한 물고기가 여인네를 덥석, 아니 해금을 켜는 여인네를 덥석 물었는데, 작살을 든 자들이, 아! 외나무다리! 그러니까…….”

진수는 랑간의 이야기가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하고는, 잡은 물고기들이 죽기 전에 사또에게 진상해야 한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에는 허름한 초가집 한 채만이 유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초가집으로 돌아온 랑간은 언제나처럼 부엌으로 가서 장작불로 데워진 따뜻한 물을 커다란 나무 목욕통 안에 넣고, 그 물에 나신으로 들어가 바닷물을 씻으며 물질로 지친 몸을 가누었다.

몸을 씻고 나온 랑간이 마루에 앉아서 바닷속에서 가져온 활대를 들고 어해금을 켜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마루 한쪽에 있는 엄마의 해금과 활대를 들고 중현과 유현을 켜 보았다. 그러면 그녀의 익숙한 연주 솜씨에 해금의 고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랑간이 엄마의 활대로 어해금을 다시 켜 보아도 역시 소리가 안 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랑간이 거기 밖에 누가 왔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불길한 예감에 자신의 손때가 묻은 목검을 들고 문밖으로 조심스럽게 나가 보았다.

대문 밖에는 벌거벗은 몸의 아름다운 여인이 등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여인이 자신을 부축하는 랑간을 힘겹게 응시했다.

“나를 보았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됩니다.”

“알았어요. 근데 괜찮아요? 이 피 좀 봐.”

당황하고 있는 랑간의 품에 안긴 여인이 의식을 잃었다.

랑간은 그 여인을 자신의 방으로 옮겨서 이불 위에 눕히고, 낡은 천을 찢어서 피가 흐르는 등을 여러 겹으로 동여맸다. 그렇게 동여맨 천 위로 붉은 핏물이 번져나갔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파고와 염선길, 아도, 서율, 허검은 비로소 찾은 인어를 눈앞에서 놓쳤다며 분개하고 있었다. 거기에 동지들의 목숨과 바꾼 어해금마저 잃어버렸다고 탄식했다. 이에 파고가 부하들을 독려했다.

“등에 작살을 맞았다. 인어 꼬리는 괴력의 힘과 스스로 치유해 내는 신비함 또한 지녔지만, 상체 쪽은 인간과 똑같으니, 그 상처 난 몸을 이끌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기필코 잡을 것이니 너무 염려들 말거라. 우선은 바닷속에 수장된 어해금을 찾을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파고가 안주를 가져온 주모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이 고을 사또는 백성들을 어찌 다스리는가?”

“말도 마쇼. 우리 고을 사또는 백성들이 가진 게 다 제 것인 줄 아는 자인에 아마 조선 팔도에 내로라하는 탐관오리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파렴치한 일게요.”

“그런 놈을 조종에서는 가만두고 만 보고 있는 거요?”

염선길이 노여워하며 끼어들었다.

“왜 그걸 모르시오? 사또 친 형님이 수군절도사 자리에 있는데, 조정에서도 그를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소?”

한쪽에서 술을 마시던 천민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거들었다.

천민 남자 앞에서 술을 마시던 사내도 끼어든다.

“수군절도수를 형님으로 두었는데 사또가 무서울 게 뭐 있겠어?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 등골을 빼 먹으면서도 그리 당당한 게지. 에이 더러운 세상…….”

그때, 사내가 누군가를 보고 얼른 말을 멈췄다.

파고가 말을 멈춘 사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여인네처럼 곱상하게 생긴 김현기가 기생들과 함께 헤헤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한쪽 다리가 살짝 저는 것 같이 보였다.

“저자는 누구인가?”

파고가 주모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하나밖에 없는 사또 외아들 아니오? 오늘도 여지없이 기생질이구먼. 귀신은 다 뭐하나 몰라. 저런 거 안 잡아가고.”

“저자가 다리를 저는 것 같던데, 맞소?”

“어렸을 때 동창에 걸려 다섯 발가락을 다 잘렸다고 합디다.”

파고가 왠지 회심 어린 미소를 짓고는 주모에게 이 부근 바다에서 제일가는 어부가 누구냐 물으면, 그녀는 사또의 외거노비인 진수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파고가 그가 사는 곳 또한 물으면, 주모는 이제 귀찮은지 성의 없이 대꾸한다.

“저 아래 바닷가 부근에 사는데, 그곳은 해적질하는 왜구가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곳이라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오.”

“왜 그자만 그런 곳에 사는 것이오?”

주모가 다른 손님의 부름을 받고 가버리면, 조금 전 해안가에서 랑간 얼굴을 보고 조롱했었던 한 어부가 말을 이었다.

“딸년 랑간 때문이지. 그 얼굴을 들고 어디 사람들을 뻔뻔히 볼 수 있겠나?”

그의 말을 들은 주막 사람들이 모두 함께 비웃을 때, 씨알 굵은 옥돔 한 마리가 매달려 있는 새끼줄을 어깨에 멘 진수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서 딸을 조롱했었던 어부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그의 단단한 주먹과 발길질에 두 어부가 바닥으로 패대기쳐졌지만, 사람들은 진수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며 감히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두 어부가 주막 밖으로 간신히 도망치면, 진수가 주막에 있는 사람들 모두 들으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