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0년대.

잔뜩 흐린 잿빛하늘에 해가 뜨기 시작하자 결혼도감*을 에워싸고 있던 순군*들의 얼굴에서 긴장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새 한산한 거리에 하나 둘 모여든 백성들은 그들이 대비했던 숫자를 넘어섰고 통제가 어려울 정도였다.

순군장이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다 마른 기침소리를 내며 결혼도감의 궁형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곧 이어 창을 든 순군들이 연이어 밖으로 뛰어 나왔다.

막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시간이 멈춘 듯 순군들과 백성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시선의 끝이 닿는 도로에서 말을 탄 장병들이 커다란 마차를 호위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고 때를 맞추듯 원성과 탄식이 번져나갔다. 순군들은 단순한 의전적 행위가 아닌 창을 옆으로 세워 백성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진심으로 막아서기 시작했다.

마차가 멈추고 중년의 한 여인이 그 안에서 내려섰다. 원성공*이었다. 그 옆에는 호위를 하듯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유독 눈에 띄게 서 있었다.

원성공이 결혼도감의 궁형대문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백성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여인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한 섞인 외마디 울음을 토해냈고 여인들의 악이 섞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악다구니도 시작됐다.

목소리
딸들을 창녀로 보내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이냐? 이게 아이를 낳은 년이 할 짓이냐!

그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울린 순간, 원성공이 천천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뒤따르던 무리들이 부딪치고 그중엔 넘어지는 자도 있었다.

원성공은 흥미에 이끌린 듯 소리 나는 방향을 싸늘하고 무감동하게 바라보았다.

그건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원성공의 눈빛이 지나갈 때마다 백성들의 사이로 침묵이 퍼져나갔지만, 눈빛에 담긴 원망과 분노는 누구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원성공의 눈빛이 백성들의 무리 중 한 사내에게서 멈췄다. 그 사내는 원성공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원성공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순군들이 원성공이 걷는 방향의 백성들을 밀어내 좌우를 헤치고 그 사내를 붙잡았다.

원성공
다시 말해 보거라.

사내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악이 오른 눈빛과 속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외쳤다.

사내
아이를 낳은 년이 할 짓이냐!

원성공은 즐거운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원성공
못 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할 말을 하는 거 보니 왕 보단 났구나. 혀를 놀렸으니 사내답게 책임을 지거라.

원성공이 말을 마치자마자 사내를 둘러싸고 있던 순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사내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무언가를 더 소리치려 했으나 순군이 내려친 창 밑바닥에 입을 얻어맞아 치아가 부러지고 입 안 가득 피가 고여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결혼도감 안으로 들어온 원성공의 화려한 신발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 화려한 신발이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자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들이 여기저기에 무늬를 넣은 듯 자리하고 있었다.

그 핏자국들이 이어져 있는 곳을 향해 원성공의 화려한 신발이 핏자국들을 짓이기 듯 밟아 나아갔다.

그 길의 끝에 궁형문이 나오고 순군들과 함께 긴장한 표정의 결혼도감 관리들이 원성공을 맞았다. 그 문 안으로 들어서자 중앙에는 공포에 질려 있는 소녀가 붙잡혀 포박되어 있고 그 너머에는 모진 고문을 당한 그 소녀의 늙은 아비 홍규*가 피투성이가 되어 매달려있었다.

원성공은 찬찬히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소녀에게로 다가섰다. 소녀는 비구니처럼 삭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원성공이 그 앞에 서자 고문하던 관리들이 눈빛을 피하던 소녀의 머리를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원성공
네 년이로구나. 누가 그 머리를 깎았느냐?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싸늘하게 울려 퍼졌다. 홍규의 여식은 원성공의 기에 눌려 떨면서도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식
스스로… 잘랐습니다.

원성공의 한쪽 눈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리고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원성공
뭐라? 묻겠다. 네년 머리카락이 누구 것이냐? 아니, 네년 몸뚱아리가 누구 것인지 말하라!

홍규의 여식이 양 미간을 모으고 입을 앙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핏줄이 서 있는 두 눈에서 눈물이 맺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원성공이 얼굴을 괴이쩍게 일그러뜨린 채로 한손을 내밀자 고문을 담당하던 관리가 손에 들고 있던 철편을 건넸다.

철편소리
부웅.

원성공이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르는 쇳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그럼에도 홍규의 여식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고 철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점점 쇳소리가 높아지자 결국 신음소리가 울리고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피와 함께 살점이 튀어 올랐고 그 모습을 원성공 뒤에 있던 몇몇 신하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홍규
제발, 제발! 그만하시오. 내가 머리를 깎았소. 도대체 나라를 위해 살아온 내게 왜 이러는 것이오. 나를 처벌하시고 내 딸은 풀어주시오. 이 목 내어드리리다.

더 이상 볼 수가 없던 홍규가 처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홍규의 여식이 아비를 감싸듯 말을 이어 대답했다.

여식
제가 스스로 했습니다.

서로를 감싸는 홍규와 여식을 경멸의 눈빛으로 보던 원성공은 철편을 들고 피가 혈관에서 요동치는 듯 점점 더 여식을 힘껏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홍규의 딸은 이를 물고 버텼다. 그러나 결국 ‘악’하는 단발마의 비명으로 끝내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린 딸의 그 모습을 본 아비의 눈에 핏빛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떨리는 입을 앙다물었다.

홍규
으드득.

이가 부서지는 소리 들려왔고 입술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원성공은 그 후에도 두어 번 더 홍규의 여식을 내려친 후, 힘에 부치는지 거친 숨을 내쉬며 철편을 내던져버렸다.

원성공
이년은 도문강*에 맞이하러 온 사신단에게 선물로 주거라. 그리고 이놈은 딸을 위해 죽을 각오인 놈이니 공녀 호송하는 날, 십자 거리에서 목을 베라.

그러자 원성공의 뒤에 있던 태부*가 나서서 한 마디를 했다.

태부
원성공, 홍규는 원나라도 인정한 국가공신입니다. 이 자의 죄는 무거우나 참수를 한다면 원나라에도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태부 뒤에 서 있던 다른 관리들도 같이 만류하기 시작했다. 원나라라는 말에 잠시 표정이 바뀐 원성공은 잠시 생각을 하다 별 상관없다는 듯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원성공
그래? 그렇다면 유배형에 처해라. 그리고 공녀의 수를 배로 늘린다. 고위 관리들도 예외는 없다.

그 말에 다들 충격 받은 표정으로 변하며 침묵이 허공을 메웠다. 원성공은 뒤돌아서서 열려있는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호위를 하는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뒤따랐다. 관리들이 원성공의 뒷모습에 고개를 숙이며 ‘존명’을 외친다.

결혼도감의 복도.

철편을 휘둘러서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원성공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멈춰서고 기골이 장대한 사내를 불렀다.

원성공
흘라테*, 이 나라의 진짜 실력자가 누구냐?
흘라테
은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영공 정만평입니다.

흘라테가 주저 없이 대답을 하자 원성공이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원성공
역시 그 자로구나. 심해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 자를 끌어내야 겠다. 딸이 있지 않은가?
흘라테
14세 무남독녀가 있습니다.
원성공
아하하하.

원성공의 웃음이 터지고 곧 결혼도감 내에서 높게 울렸다. 그 뒤를 뒤따르던 태부를 비롯한 관리들의 표정이 대조적으로 심상치 않게 변해가기 시작했고 내리던 부슬비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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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감 - 원나라에 보낼 공녀 차출을 위해 개설된 국가기관

*순군 -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방도금란(防盜禁亂)을 맡아본 순마소의 관원. 고려가 원나라의 정치적 지배를 받으면서 종래 포도기관(浦盜機關)이던 야별초가 혁파되고, 충렬왕(忠烈王) 초에 몽골의 제도를 모방한 순마소(巡馬所)가 설치되어 이 업무를 맡아 봄

*원성공 - 충렬왕의 비로 원나라 쿠빌라이 카한(황제)의 딸이자 몽골 황금씨족. 훗날 제국대장공주로 칭하게 됨. 이하 원성공으로 한다.

*홍규 - 고려 말의 문신으로 원나라 황제에게도 추밀원부사 관직을 받았던 공신. 고려로 돌아온 뒤, 관직에 있는 자들이 권세가에게 아부하는 등 국정이 문란하자 관직을 사퇴했으며, 다시 추밀원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도문강 - 두만강의 옛 명

*태부 - 고려시대에 왕자·부마·비부 등의 종실과 공신 및 고위 관원에게 내렸던 벼슬의 하나.

*흘라테 – 원나라 출신으로 원성공주의 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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