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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수레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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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집보다 더 큰 쓰레기 봉투를 들러 메고 나와 지저분한 골목 구석에 힘겹게 내려놓는 여자. 가녀린 몸만큼이나 가느다란 소시지를 입에 반쯤 물고 오물오물 씹어먹는 모습이 귀엽지만 살짝 애처로워 보였다. 씩씩하게 손을 탁탁 털고 돌아서는 순간 어디선가 야옹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고양이였다. 배가 고픈 듯 쓰레기통을 뒤적이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는지 그녀는 고양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밥 벌어먹기 힘든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녀는 먹다 남은 소시지를 과감하게 고양이 앞에 내려놓았다.

“에휴, 너도 먹고사느라 많이 힘들지? 얻어먹는다고 괜히 주눅들지 말고, 배고프면 언제든지 와. 알았지?”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

“심성이 참 고와. 언제 봐도 마음이 따뜻해, 쓰잘머리 없이. 그지?”

두텁고 거친, 게다가 비아냥까지 섞인 목소리에 그녀는 움찔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먼저 느낀 고양이가 소시지를 그대로 둔 채 재빨리 줄행랑을 치자 그녀도 난감한 표정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누가 봐도 사채업자 똘마니의 모습을 한 덩치들이 독 안에 든 쥐를 본 들고양이마냥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꼭꼭 숨었는데도 어떻게 찾았을까 싶지만 요즘처럼 스마트한 세상에 앱으로 안되는 게 어디 있을까. 아무리 단순무식한 양아치들이라도 위치 추적 정도는 껌이나 다름없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스마트한 세상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혀 스마트하지 않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뿐이다. 삼십육계 줄행랑!

덩치들이 순간 방심한 틈을 타 그녀는 순식간에 가게 뒷문을 열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우당탕탕 요란하게 쫓아오는 덩치들을 피해 황급히 계단을 타고 호프집 홀을 가로질러 주방 쪽으로 뛰더니 구석에 둔 허름한 짐가방과 기타를 재빨리 챙겨들고 쪽문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두 번 도망을 다녀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러나 덩치들도 한두 번 쫓아다닌 솜씨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리기 선수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전력 질주를 하던 그녀는 저만치 방송국 앞에 구름 떼처럼 몰려 있는 팬들 사이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뒤늦게 도착한 덩치들이 백여 명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극성맞은 여고생 팬들 사이에서 그녀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팬들의 바리케이드 속에 안전하게 몸을 숨긴 그녀는 드디어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

윤세나. 스물다섯 꽃다운 청춘에 어쩌다 이렇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고 있다. 또래 여자들은 최신 유행 명품 가방이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라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든 바로 떠날 수 있는 소박한 짐가방과 목숨처럼 아끼는 기타가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어딜 가든 항상 도망갈 동선 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

제주 앞바다가 바라다보이는 한적한 숲길 사이에 숨어 있는 듯한 작고 아담한 집. 담도 출입문도 없이 탁 트인 마당 안에는 잡풀들과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잔디 위에는 골든 레트리버 한 마리가 나른하게 앉아 공을 깨물며 놀고 있었다. 그 뒤 활짝 열린 커다란 창문 안에 서는 현욱이 아일랜드 식탁 앞에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샐러드를 만들고 있다. 데친 브로콜리를 건져 톡톡 날렵하게 자르고, 싱싱한 채소는 손으로 가볍게 뜯어내는 모습이 마치 CF 의 한 장면처럼 스타일리시했다. 그런 현욱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던 히피 스타일의 이웃집 여자가 오래 참았다는 듯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와, 보기만 해도 근사하다. 아예 간판을 내걸지. 벌써 입소문이 많이 났던데. 원래 직업이 요리사였어요?”

친절한 대답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현욱은 샐러드 접시를 이웃집 여자 앞에 성의 없이 탁 내려놓았다. 그런 퉁명스러움이 오히려 여자의 도전정신을 불끈 일으키게 만들었는지 여자는 더욱 심한 콧소리를 내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쳇, 비밀이 너무 많다니까? 음! 맛이 끝내준다, 진짜. 나한테 98 년산 보르도가 있는데, 갈래요?”

끈적끈적하고 끈기 있는 여자의 교태에 현욱은 피식 웃어넘겼다.

“어쩌지? 나한텐 83 년산 여자가 있는데.”

현욱의 세련된 거절에 이번에는 이웃집 여자가 피식 웃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여자라고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무슨 여자 타령인가 싶어서였다. 그때 또각또각 선명한 구두 소리와 함께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해윤이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해윤의 모습에 이웃집 여자는 방금 전 현욱이 말한 83 년산 여자가 혹시 저 여자인가 싶어 현욱을 쳐다보았다. 현욱이 익살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자 이웃집 여자는 기분이 상한 듯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한 웃음으로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하는 현욱에게 해윤이 성큼성큼 다가와 원망스럽다는 듯 마구 때렸다.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웃음이 나? 어떻게 3 년 동안 연락 한번 안 할 수가 있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앙칼지게 화풀이를 해대다 어느새 울먹이고 있는 해윤의 갸날픈 솜방망이 구타를 현욱은 그대로 서서 다 받아주었다. 해윤이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기에.

*

“신해윤 진짜 바보네. 이렇게 가까운데 있었는데도 못 찾구.”

약간 취기가 오른 해윤이 캔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신세 한탄을 했다. 벌써 몇 시간째 서울로 가자고 설득을 하는데도 도무지 말을 안 듣는 현욱이 해윤은 답답하기만 했다.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잘 나가던 최고의 작곡가가 이런 촌구석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마음만 먹으면 수억, 아니 수십 억도 벌 수 있는 사람이 왜 이러고 있는지 말이다. 그런 해윤의 마음을 안다는 듯 현욱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안 하기로 결심한 게 두 가지 있어. 음악, 그리고 연애.”

그 말에 해윤이 원망스런 표정으로 현욱을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무방비 상태의 현욱에게 불쑥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현욱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해윤이 빙그레 웃었다.

“키스가 되네. 그럼 나머지 둘도 될 거야.”

매사에 늘 당당한 해윤다운 행동이었다.

“몹쓸 주사 여전하다? 넌 어떻게 술만 취하면 아무한테나 입술을 들이대니?”

해윤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 몹쓸 주사는 현욱에게만 해당된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늘 저렇게 모른 척하는 게 약이 올라서였다. 해윤이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켜는 사이 현욱이 마당에 있는 골든 레트리버를 향해 달봉아 하고 손짓을 하자 달봉이 현욱 옆으로 와 익숙한 듯 자리를 잡았다. 사랑스럽게 개를 쓰다듬는 현욱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 개였다. 아직도 키우는구나 생각하니 문득 불안해진 해윤이 한마디 던졌다.

“그 여자, 아직 못 잊은 거지?”

달봉이를 쓰다듬던 현욱의 손이 멈칫했다. 잊는다는 게 뭘까, 한 번도 생각 안 나는 거? 아니면 생각나도 아무렇지 않은 거? 적어도 전자는 아닌 듯했다. 현욱의 씁쓸한 미소를 보며 해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도망가지 마. 부탁이야.”

*

“아, 언제까지 도망다녀야 하나 ….”

허름한 짐가방과 기타를 안고 한강 변 구석진 벤치에 앉아 있는 세나가 밤마을 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다 더 부럽고 이보다 더 슬플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어디 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 … 한강 둔치 나왔다? 가족들도 있고 연인들도 있고 사람 엄청 많은데, 나만 혼자야. 이럴 때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아… 어떡하지 이제? 나 어디로 가야 되는 거야?….”

끝내 말을 잊지 못하고 세나가 쪼그려 앉은 무릎 위로 고개를 푹 묻었다.

*

쿠르릉 콰광. 섬이라 그런지 제주도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지없었다.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세차게 불어오는 비바람에 나무들이 휘청거리고 순식간에 안개가 몰려왔다. 참 묘한 날씨라 생각하며 문단속을 하고 돌아서자 순간 빠직 하고 정전이 되었고 놀란 달봉이 짖어댔다. 그 순간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촛불을 켜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울리는 벨소리를 따라가던 현욱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서랍장 안이었다. 놀란 현욱이 서랍장 속의 조그만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어젖히자 목걸이와 함께 놓인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설마! 충격으로 얼어붙은 현욱이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집으려 하자 그 순간 거짓말처럼 벨 소리가 뚝 끊겼다 . 그리고 이내 띠링 하고 뜨는 음성 메시지 확인 문자. 현욱이 조심스레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대자 누군가의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너무 무서워, 너무 막막해… 왜 그랬어? 왜 나만 두고 가버렸어, 왜?”

띠리릭. 휴대전화 전원이 다시 꺼졌다. 현욱은 넋이 나간 듯 전원 버튼을 다시 눌러보았지만 휴대전화는 작동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꽝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뭔가 떠올랐는지 현욱은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3년 전 그날이었다. 그날은 현욱이 작사 작곡한 신인가수 멜로디의 노래가 처음으로 전파를 타는 역사적이고도 기쁜 날이었다. 그러나 그날이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 소은과의 마지막 날이, 가장 슬픈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소은은 현욱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현욱의 아버지에게 불려가 듣지 말아야 할 경고도 들었고, 현욱이 신인가수 멜로디랑 잤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녀는 자꾸만 화가 나서 현욱에게 헤어지자며 악다구니를 썼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 그녀도 왜 그리 삐딱하게 구는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들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현욱의 온몸에 생채기를 냈다.

그래도 그때 그녀를 차에 혼자 두고 내리는 게 아니었다. 함께만 있었어도, 조금만 더 참았더라도 그녀를 지킬 수 있었는데, 아니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는데. 현욱은 아직도 그때를 생각 하면 괴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거대한 트럭이 국도 변에 세워놓은 그의 차를 야속하게 덮치던 순간,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 안에서 피투성이 가 된 채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며 괜히 싸웠다고 미안해하던 그녀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생명이 끝나가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현욱이 만든 신나는 댄스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야속하게도 그의 댄스곡은 멀쩡히 살아남아서 히트곡이 되 었다.

천둥번개가 잦아들고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거실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쥔 현욱을 달봉이 애처로운 듯 할짝할짝 핥아주며 위로했다. 그제야 현욱은 정신이 들었는지 손에 쥔 휴대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 달봉을 껴안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도 잠자기는 다 틀린 것 같았다.

1 홍염살111 (1화)
현욱이의 음악 분위기를 엿보고 싶군요.잼있게 읽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