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며 어스름이 깔려왔다.

해발 650미터의 우거진 산 중턱, 1만8천여 평의 캠프 중앙에 자리잡은 목조산장이 신호를 보내듯 하나둘 석등을 켜들고 있었다. 산장 좌상 방향에, 착륙장을 뜻하는 H 표지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났다. 프로펠러를 돌리며 밤하늘에 떠 있던 민간 헬리콥터는 고도를 낮춰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누가 올라갔게?”

붉은 나비넥타이에 크림빛 연미복을 차려입은 날씬한 청년이, 화장실 쪽에서 걸어 내려오 는 같은 복장의 청년에게 소리쳤다. 두 청년은 모두 흰 면장갑을 꼈고, 왼 손에 직사각형의 검은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귀에는 흰 선으로 연결된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대통령이라도 올라갔어?”

“여울이 올라갔어.”

“누구?”

“강여울 말이야.”

“탤런트 강여울?”

“그래. 니 사랑 강여울이 바로 내 눈 앞을 지나갔다고.”

“헉, 왜 하필 그때야.”

말은 그렇게 해도, 청년의 얼굴에는 농담을 들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니가 직접 봤어야 했는데. 스키니 진을 입었는데 엉덩이가 장난 아니었어.”

눈앞에 실물이 떠오르는 듯 청년은 감회에 젖은 표정이 되었다.

“거긴 니가 해. 난 가슴 쪽이니까.”

“엄청 고맙다. 그런데 너 뭘 잘못 먹었냐? 왜 그렇게 오래 앉아 있은 거야.”

“먹긴 뭘 먹어. 점심 먹을 시간도 없었어. 그냥 배가 아픈 거야.”

“실적 증진 대회니 뭐니 대기업치들 대낮부터 처먹는 거 보니까 배가 아파 그런 거 아냐?”

“아직도 그런 생각 하냐? 난 그저 계속 연어만 먹어대는 미친년들만 없었으면 좋겠어.”

“그래놓고 음식 하나 떨어지면 우리만 개쌍욕 얻어먹지.”

“야,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뭐 같다. 출장 뷔페가 아니라 대통령 경호원 같지 않냐?”

두 청년은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대고 웃었다.

“근데 우리 이따 뭐 먹을 시간 있을까?”

여울의 엉덩이를 차지한 청년이 날이면 날마다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진작 좀 먹지. 너 파티 음식 드시다간.”

여울의 가슴을 차지한 청년이 손으로 목을 그었다.

“하긴 뷔페도 물린다. 서울 가서 야식이나 먹자.”

“참 오늘 미자 나온다 했지?”

“미자는 나올 거야. 희수는 모르지만.”

“넌 희수 개가 어디가 그렇게 좋냐? 키는 작달만 하고.” “미자는 뭐 나은 줄 알아? 그 나이에 벌써 배가 뽈록해 가지고.”

“배 베고 누워 있으면 잠이 얼마나 잘 오는데 그래?”

“잘도 오겠다. 야, 손님 온다.”

화장실에 앉아 있느라 강여울을 놓친 연미복이 몇 발 앞으로 나서서 남녀 한 쌍을 맞이했다. 남녀는 30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여자는 사방 풍경이 적군이나 되는 듯 눈에 힘을 주고 둘러보며 파티장으로 올라갔다.

청년들은, 승용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고급 슈트와 화려한 드레스로 성장한 신사숙녀들을 산장 진입로로 안내하는 중대임무를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두 시간 가까이 여기 서 있었지만, 20대 중반의 장정들인지라 별반 지친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여성이 화장실을 찾을 땐 온화한 미소를 짓되, 화장실 방향으로 서너 걸음 먼저 움직이며 두 팔로 모시는 형태를 취하라고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고 있었다.

신사숙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통나무 그루터기와 검은 자갈과 붉은 보도블럭을 차례대로 밟고 뼛가루빛 화강암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면, 열두 개의 석등과 네 개의 키다리 옥외등이 밝히고 있는 푸른 정원이 눈앞에 전격 펼쳐졌다.

이제 정원은 파티의 필요 정족수를 채운 듯했다. 황금빛으로 물든 대기가 꿈결처럼 흐르는 정원 곳곳, 잘 가꾸어진 정원수 사이사이 탐스런 꽃봉오리들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꽃봉오리들은 촉촉한 겹겹의 입술로 미혹적인 향기를 퍼뜨리며 절정의 봄을 속삭이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되었다.

현악 사중주단이 라벨을 연주하고 있는 가운데, 상징과 은유의 숲을 거느린 풍자 문학의 대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그 이름이 세 차례나 거론된 바 있는 노 소설가가 위압적일 정도로 당당한 풍채를 정원 입구에 드러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어나며 파티는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파티의 성격과 취지는 분명치 않아 보였다. 그러나 드물게 멋진 파티가 될 것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강남구 신사동에서 한 시간 반 거리인 캠프는, 새 휴양지로 떠오르고 있는 ‘옛바람’ 수목원과 강 하나 사이로 마주하고 있었다. 휴일이면, 피톤치드가 살아있는 수목원의 공기를 한 입이라도 삼켜보려는 남녀노소를 실은 각종 차들로 Y군의 진입도로는 마비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진입로에서 1킬로 들어간 지점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는 작은 도로는 마치 현실의 길이 아닌 듯 텅 비어 있기 일쑤였다.

계단식 논밭을 끼고 있는 일차선 시멘트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도, 볼 수 있는 건 돼지를 치고 닭과 오리를 키우는 농가 몇 채와 자재 및 잡동사니들을 쌓아놓은 슬레이트 창고들뿐이었다. 몸빼바지 여인들과 밀짚모자 내지 스포츠모자 늙수구레 사내들이 손에 농기구를 들고 논밭 가운데서 허리를 숙이고 일을 하거나 우두커니 서 있는 광경이 볼거리라면 볼거리였다. 그러나 마지막 농가를 뒤로 하고 10여 분 더 올라가면 아랫마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A캠프라는 이름으로 펼쳐져 있었다. 평소엔 적막에 쌓여 있던 그 세계가 오늘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수런거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부터, 헬리콥터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가 하면 Y군 시가지에서도 좀체 만나기 힘든 고급 승용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헤드라이틀 켜고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지금도 엉덩이에 벤츠 500 마크를 단, 시커먼 유리로 인해 그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은빛 바디 차 한 대가, 낡은 점퍼 차림의 할아범과 코흘리개 두 사내아이를 갓길로 밀어내며 산 중턱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차의 뒷좌석에는 터질 듯한 가슴이 트레이드마크인 20대 여배우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 차뿐 아니라 앞서간 수많은 차의 승객들은 하나같이, 길가에 나와 있는 이곳 주민들을 그자들이 키우는 개, 돼지와 따로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차로 깔아뭉갰을 때에만 문제가 됨직한 희귀동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원주민들의 존재를 잠시라도 의식하기엔 그들의 머리는 너무도 복잡했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겨우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 그들 주변에 널려 있었다. 그들이 A캠프의 파티에 참석하고 있는 건, 그러므로 그다지 한가한 놀이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는 삶의 재충전, 누구에게는 거래의 현장, 누구에게는 허영심의 충족이라는 심오한 의미가 살아있는 모임이었다.

캠프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Y군의 수려한 전원 경관과, 도시의 먼지에 찌든 폐를 정화하는 차갑고 신선한 공기는, 이들, 나날의 격무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생기를 돌려주었다. 정치가들, 금융인들, 기업인들, 학자들, 예술가들, 연예인들, 가히 21세기의 전문직종을 망라하는 이들 중엔 국민의 반은 알아볼 만큼 유명한 자가 있는가 하면,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청년과 새로운 만남과 자극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는 숙녀도 끼어 있었다.

3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 밤이었다.

*

캠프의 주인인 주치원 회장은 착 달라붙은 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40대 후반의 깡마른 남자였다. 정원을 끼고 있는 산장의 2층 서재에서 그는 저 멀리 어둠에 묻혀가는 강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늦은 오후 내내 여기 머물러 앉아, 강을 가로지르는 새들의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비행의 궤적 뒤에 남겨진 텅 빈 공간을 응시하였다. 이윽고 저녁이 오면서 강 건너 마을에 번지듯이 등불이 켜지자, 마을을 감싸고 있는 거무튀튀한 산의 희미한 윤곽이 드러났다.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며 뻗어가는 산등성이 위로 노을이 잠시 머물렀다 스러져갔다.

회색빛이 도는 검은 슈트를 갖춰 입은 주 회장은 중후하게 울려 퍼지는 현악 사중주단의 베토벤 연주에 맞춰 현관문을 열고 천천히 나무계단을 내려왔다. 그 모습이 언뜻 신전을 내려오는 제사장의 권능과 위엄을 내비치면서 정원은 일순 침묵에 빠져들었다.

주 회장의 공식적인 직함은 ‘전통혼례 계승 중앙협회 고문’이었다. 그는 여러 해에 걸쳐 숱한 직함을 고사, 반려하였으나 어찌된 셈인지 이 직함만은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을 상기시키려는 듯 불 밝힌 정원의 식탁엔 스카치, 와인, 사케 외에도 전통 곡주인 안동 소주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막걸리’가 빠지지 않은 건, 웰빙 트렌드 외에도 앞 다투어 주당 클럽에 가세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을 반영한 것이리라.

차려진 음식들로 말하자면, 개개인의 예민한 식성들을 감안하여 각종 신선한 식재료를 굽고 데치고 삶고 버무려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대세라고 할 수 있는 이태리 요리와 떠오르는 타이 요리를 발견하고는 쾌재를 부르거나 크게 안도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초특급호텔의 VIP 고객들에게나 제공되는 엄선된 특선 요리들이, 여기서는 그저 손님의 비위를 맞추려는 평범한 음식처럼 식탁 위에 길게 차려져 있었다. 네 가지 크기의 접시와 빛나는 은제 수저 및 포커들은 호텔 뷔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범용한 세트가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은 이미 요리를 한 두 점씩은 맛보았고 술도 약간은 입에 댄 상태였다. 그리하여 다소 흐트러지고 느슨해진 그들에게 주 회장의 전격적인 등장은 새로운 긴장을 요구해왔다. 주 회장의 공식적인 언급이 없는 한 파티는 아직 시작되었다고 할 수 없었다.

“우리를 초대하신 주치원 회장이십니다. 십여 년 전 경제계를 은퇴하신 후 이곳에서 맑은 공기와 자연을 벗 삼아 명상활동에 주력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