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 움직였다.

오전부터 몸을 틀며 꿈틀대던 시가총액 12조 대의 물건이 오후 두 시 경 머리를 치켜들었다. 한 달을 들고 있다가 어제 던져 버린 놈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컴퓨터에서 K의 창을 지워버렸다. 윈윈증권(win win securities)신사지점 영업대리 맹소해. 그런 이름으로 영업점 근무 몇 년 만에 배운 게 있다면, 던져버린 종목에 미련을 두지 않는 거다. 과거의 남자처럼 망각 속으로 보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K가 아니라 P였다.

최근의 P(파인 인더스트리)는 미약한 등락만 거듭할 뿐 추세전환의 조짐을 보여주지 못했다. 벌써 석 달째. 투자자들도 지칠 시점이 되었다. 다음 주까진 가시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정보는 정확한데 시장이 반영을 못 시키고 있다, 그런 변명을 언제까지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똥주 아니야?

안 오르면 똥주라고 부르는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P는 화섬, 석유화학 및 전자제품까지 다루는 중견 종합상사다. 탄탄한 재무구조에 중국과 동남아 쪽 수출이 늘면서 매출도 호조를 보이고 있었다. 내가 중점 관리하는 13계좌의 총자산액은 전일 종가 기준으로 171억 원. 이 중 65억 원이 P에 잠겨있다. 그 중엔 소액이지만 내 돈도 끼어 있었다. 내 돈! 이거 중요하다.

깍지 손을 뒷목에 받치고 윗몸을 한껏 제킨다. 긴장아 풀려라, 하고 수시로 해주는 스트레칭이다. 부스 안, 내 등 뒤에서는 3월 초순의 햇살이 48층의 젖빛 블라인드를 밝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금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간다면 최근 1년 사이 시가총액이 두 배로 늘어난 T그룹 본사 건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지척에 있는 보석을 두고 엉뚱한 회사에 배팅을 하다니! 등잔 밑이 아니라 등 뒤가 어둡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세시가 넘자 컴퓨터의 주식난엔 숫자가 깜박거리지 않았다. 종가가 나온 것이다. 옵션, 선물 쪽은 마지막 거래를 청산하느라 체결량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쪽은 무시하였다. 파생상품 비중을 최근에 대폭 줄여놓았던 것이다. 헷지는커녕 위험부담만 커져가는 모양새를 더는 방치할 수는 없었다.

-대박 아니면 쪽박으로 가는 거지.

말하기는 쉽다. 쪽박 차 보면, 실제론 많이 슬프다.

경기철강 민 감사의 전화가 왔다. 부장에서 감사로 발령 난 후 부쩍 전화가 잦아졌다. 개인적인 용무이다 보니 휴대폰을 사용한다. 임원이 되면 회사전화는 사적인 용도로 쓰기가 부담스러워진다. 거래처나 동종업체와의 분쟁 발생 시 유리한 진술을 확보하기 위해서 통화내용이 종일 녹음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직통전화도 자동 녹음되어 본체에 백업된다. 지점에서는 녹음 내용을 최소 3년간 보존한다.

“맹 대리, 민 감사예요. ……오늘도 그렇지? ……디지털테크는 어때? ……너무 올랐다고? 사지 마? ……엠앤에이 한다며? …… 세력들이 흘리는 정보야?”

기업체 임원이라도 가끔 엉뚱한 정보를 들고 와 혼선을 일으킨다. 쓸 만한 정보는 열에 두 셋이 넘지 않는다. 애인이 있다면, 차라리 애인으로부터 정보를 얻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 뭘 사달라고 하면, 사주되 그 회사 주식도 사두라. 그럼 선물 값은 뽑을지도 모른다.

커피 머신에서 아메리카노를 내려 들고 57층의 스카이 파크로 갔다. 멀리 강변까지 시야가 트여 있다. 나무그늘 아래 벤치가 비어 있었다. 이 시간이면 가끔 여기, 글라스가 덮인 파크에서 커피 한 잔에 담배를 빼 문다. 장이 마감되면 결과에 상관없이 긴장을 푸는 것이 나에겐 중요하다.

73층 높이의 초고층 쌍둥이빌딩 ‘주노’는 52층과 53층에 걸쳐 동관과 서관을 연결하는 스카이 브리지가 있고, 25층과 57층에 스카이 파크가 있다. 나는 주로 57층의 파크를 이용했다.

얼마 전엔 서관 옥상에서 영화 촬영이 있었다고 창구의 수탁 담당 예나연이 호들갑을 떨었다. 액션 신을 찍느라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악당은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며 여주인공을 인질로 잡아둔다. 여주인공이 최후까지 살아남아 웃어 보일 때 세계 평화가 오고 새로운 사랑은 시작된다. 여주인공이 사업가와 결혼하면 남주인공과 악당과 헬리콥터 조종사는 하객으로 참석한다. 요즈음은 턱시도우 입는 남성이 늘어났다.

네 시 반에 지점장실에서 영업회의가 있다. 윈윈의 신사 지점장 백경채에게 회의는 영업 다음으로 중요했다. 영업은 회의로 시작돼 회의록에 의해 완성되었다. 회의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명동 지점장은, 머리 나쁜 아이들이 회의는 도맡아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두 지점장의 공통점은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한다는 것이다.

바지 주머니의 휴대폰이 울린다. 문자가 왔다.

<저녁에 볼까?>

<약속 있어요.>

답신을 넣고 담배를 마저 피운다. 약속은 없다. 만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최 상무는 법인영업 담당이다. 거래처 임원과 저녁 약속을 잡아두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룸살롱 앞 모텔도 이제 지겨워졌나? 이 도시에서 하룻밤에 얼마나 많은 여체가 머니와 교환되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테이크아웃 커피는 스몰이라 하더라도 끽연 후에 삼분의 일은 남는다. 직접 타면 시간대를 맞출 수 있다. 컵 바닥의 커피 찌꺼기에 꽁초를 담그고 그걸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 손이 깨끗이 빈다. 담배 없이 커피만 마실 때도 있다. 그건 적응이 좀 필요했다.

최근에 담배를 하루 한 갑에서 일곱 개비 내외로 줄였고 업무 중엔 물을 자주 마셨다. 술자리에서 연이어 물고 있는 버릇도 버렸다. 집에 돌아와서 이를 닦고 한 대 피우는 게 마지막이었다. 줄인지 2주 만에 가래가 없어졌다. 좋은 징조다. 최 상무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담배 피우는 임원은 임원답지 못하다는 견해가 횡행하고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훗날 내가 임원이 된다면 담배를 끊을 것이다. 어쩜 그 전에 끊을지 모르겠다.

“담배 한 대 얻을 수 있을까요?”

따분한 목소리다. 남자는 스카이 블루 셔츠에 네이비 블레이저를 입고 있었다. 30대 초반의 약간 마른 몸매. 담배를 건네자 남자는 금장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몇 발자국 물러나 담배를 피웠다. 나는 담배를 끄고 커피 잔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오후였다.

*

회식이나 개인적인 약속이 없다면 저녁은 마트 식당을 자주 이용한다. 혼자 먹기 편해서다. 어떤 식당은 여자 혼자 식탁에 앉아있는 그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바쁜 시간에 나 참’,

동네 기사식당 남자의 눈빛에서 분명 그걸 읽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4인용 테이블 몇 개로 장사하는 집의 골든타임은 침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마트를 이틀, 사흘 연속해서 가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머리에 나라는 인간이 각인되는 게 싫다.

세 블록 떨어진 마트를 이용하든가 초저녁부터 술이 당길 때는 초밥이나 안주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와 술을 곁들인다. 뭐니 해도 반주엔 소주가 최고다. 내 체질엔 석 잔까지는 분명 그렇다. 상대가 있을 땐 한 병 반까지도 그 맛이 유지된다. 사람의 힘은 대단하다. 알코올의 순도까지 높여버린다.

저녁 7시, 마트의 메밀국수는 그런대로 삼킬 만하다. 퇴근하기 얼마 전부터 속에서 열이 퍼져 올라와 찬 것이 먹고 싶어졌다. 메밀가루를 더 섞어달라고 하면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내오겠지? 얼마 전 시중 메밀국수에 메밀 함량이 터무니없이 낮다는 기사가 네이버에 떴다. 그 후 봉평 메밀이 그리워졌지만 스키 시즌까지 기다렸다 용평 다녀오는 길에 들리리라 꽤 먼 작정을 하게 되었다.

최 상무의 문자를 숙고했더라면 지금쯤 삼성동의 용수산 매화룸에서 한정식 b코스를 대하고 있으리라. 옥주전자에 담겨 샘물처럼 졸졸졸 따라져 나오던 그 술 이름이 뭐였더라? 4만 원이라고, 값만 기억난다.

최 상무의 팔짱을 끼고 소문난 떡볶이 집이나 강북 끝머리 생선구이 집을 순례하며 알콩달콩한 애정을 과시하는 게 어려웠던 건 아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들이 추억에 빠져들 듯 그런 소꿉장난에 흡족해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게 싫어서였을까? 최상무가 섹스 외에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까지 느끼는 게. 나는 왜 그를 만나왔던 것일까? 이 대목에선 그만 머리를 흔들게 된다.

집까지 15분, 식사 후 걷기에 적당한 거리다. 정장 차림이 걷기에 불편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정장에 익숙해지면 겨드랑이의 솔이 터져라 남자의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상반신으로 밀고 들어오는 남자의 압박 속에 벽을 타고 접혀 올라가는 치마의 꺼칠한 감촉을 즐기게도 된다.

사랑의 행위 도중에 정장이 더럽혀지는 느낌을 아는가? 캐주얼한 차림이 줄 수 없는 거친 순도의 클래식 쾌감이 거기엔 있다. 올해의 최 상무는 그런 걸 줄 수 없었다. 2월에 들어서자 그는 눈치껏 사방을 살핀 후에야 호텔 룸 키를 받아들었다. 비누로 몸의 구석구석을 닦고 공 들여 면도를 하였다. 그런 후 가운을 걸치고 침대 모서리에 앉아, 샤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서서히 몸이 달아올랐다. 그런 일련의 전희에 비해 성급하고 짧은 본 과정이 있었다.

그만의 개가도 있었다. 질외 사정 후 죽은 듯 5분을 엎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승리하는 새 방식이었다. 그 5분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길 바라는 걸까? 텅 빈 머리로 쾌락의 나른한 늪에 아래턱까지 잠겨있기를? 과분하게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10시 넘어 최 상무의 전화가 왔다. 30분 안에 동네의 바로 날아오겠다고 한다.

일주일 전, 그 바에서 그가 말했다.

“2년 정도 동경에서 근무하면 어때?”

“누구 뜻이죠? 설마 사장?”

“사장 애인은 내가 알아.”

“그럼 부인이군요.”

“널 잃고 싶지는 않아. 동경도 내 관할이야.”

홍콩, 싱가포르도 그의 관할이었다. 1년에 한번 동경 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겠다는 건가. 동경 지사장이 잡아준 호텔 룸에서 날 기다리겠다고? 끔찍할 것까진 없지만 거기서 왜 나를 기다려야 하는지, 나는 해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5분이 흘렀다. 25분이면 이를 닦고 옷을 걸친 후 천천히 걸어가 건널목을 건너는 시간으론 충분하다. 실제로 그렇게 하자 30분 후엔 그 바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밖을 내려다보자 그가 승용차 뒷문에서 내리고 있었다. 대리기사가 그에게 키를 건네주는 게 보였다.

맞은편의 그에게 취기는 없었다. 스카치 다섯 잔 정도라면 한 시간 내 평소의 얼굴빛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런 정도는 자유자재로 관리하는 사람들의 일원이었다.

“서니강 펀드의 강 사장, 젊은 친구가 잔머리를 보통 굴리는 게 아니야. 무리하게 대시하다간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식사만 하고 헤어졌어. 지중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