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추운 나라의 눈발은 거셌다. 모스코바 공산대학 교정은 이미 눈밭이었다. 그 위로 네댓 명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원치 않은 고랑을 냈다. 격한 농부들의 정체는 그동안 눈을 볼 일 없었던 동남아인이었다. 아무래도 주변 분위기와 지리적 위도에 맞지 않는 피부색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것이,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이 정식 명칭인 이곳은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이다. 다양한 피부색은 오히려 이 학교의 자랑거리였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이 추운 곳으로 왔을까. 까무스름한 피부에 떨어지는 하얀 눈을 처음 보듯,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기 위해 왔을까. 아님 만들기 위해 왔을까. 한 사내가 3층 창가에서 하얀 고랑을 내려다보았다. 호리하지만 다부진 체격에 10대 후반이라 하기엔 얼굴이 옹골찼다.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사내가 뒤돌아보았다. ‘조선민족연구회’란 팻말이 달린 방에 여자 한 명을 포함한 조선인 다섯 명이 차례로 들어왔다. 들어올 때 무리 간의 간격이나 들어와서 빈자리에 앉는 형태로 보아 편이 갈린 게 분명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이들도 많아 생각을 달리하는 무리가 더 있을 것이라고 사내는 짐작했다.

“벌써 왔는가?”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여전히 창가에 서 있는 사내에게 인사했다. 사내는 밝은 얼굴로 화답했다.

“수만아, 날이 매섭지?”

“그렇게 부르는 건 옳지 않아. 아무리 고향 친구래도 수만 동무라 해야지.”

수만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사내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반갑습네다. 나래 용진이야요.”

그는 수만과 맞은편에 앉은 걸 봐서는 뜻을 달리하는 자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동무도 이제 결정해야디. 어느 쪽으로 들어오시갔소?”

이어진 그의 말은 사내를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사내는 신중했다.

“동무들, 자기네 그룹만이 공산주의를 잘 안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가 보기에는 같소. 이론은 그만 말하고 힘을 합쳐 일본 제국주의와 싸웁시다.”

모두 사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수만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좋아. 그럼 동무는 어느 그룹에 들어가더라도 부르주아 놈들을 말살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오시오.”

수만의 말에 다시 문이 열렸다. 머리에 검을 천을 뒤집어 쓴 사람이 두 명에게 양팔이 잡힌 채 끌려 들어와 무릎을 꿇리었다.

“여기 먼 이국에서조차 동포의 피를 빨아먹는 부르주아 악질 반동분자가 있소. ……처단하시오. ……동무.”

수만은 8연발 안전장치가 없는 토카레프 권총을 사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받아 쥐는 그의 손이 잠시 떨렸다. 묵직한 무게 때문도 사람을 처음 쏴봐서도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동무의 사상 검증이 필요하오.”

수만이 사내를 재촉했다.

“누구야? 수만……동무.”

사내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창밖에 사나운 바람이 불었다. 수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사내는 지독히도 내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총구가 그의 머리를 겨누었다. 사내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손을 내뻗어 검은 천을 낚아챘다.

‘아버지!’

사내의 아비는 안면이 피범벅 되어 눈을 뜨지 못했다. 사내의 이가 떨리기 시작했다. 용진을 필두로 여자를 제외한 나머지 조선인들이 하나둘 일어서서 사내 주위를 에워쌌다. 수만은 권총을 쥔 사내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타닥, 타다닥…….’

사내의 떨리던 이는 급기야 부딪치기 시작했다.

★악수( 惡手 )의 교환

1950년 8월 23일.

도쿄 한가운데에 자리한 유엔군 사령부 6층, 한 집무실에 10여 명의 미군 장성이 자리 잡았다. 각자가 짊어진 별 개수와 상관없이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는 별 개수와 반비례했다. 별 무게가 가벼운 몇몇은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방을 훑어보았다. 열여섯 평 남짓한 방이었다. 통유리창 세 개와 그 사이사이에 호두나무로 마감된 벽이 근엄함을 자아냈다. 큰 탁자 위에 놓인 튜더 왕조풍의 집기와 장식이 그들이 달고 있는 별과 제법 잘 어울렸다.

집무실 주인은 유엔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그는 연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탄내가 고약해지자 맥아더는 파이프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워싱턴에서 날아온 세 명의 불청객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상대는 육해군 참모총장인 콜린스와 셔먼 두 대장과 공군 대표인 에드워드 중장이었다. 그들은 맥아더보다 15년 이상 후배지만 만만치 않았다. 그들 역시 양 어깨를 짓누르는 은색 별 무게를 너끈히 받아내는 백전노장이었다.

맥아더는 잠시 셔먼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태평양전쟁을 같이 겪은 옛 전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통령 트루먼이 보낸 장성 중 한 명일 뿐이다. 맥아더는 그들의 날 선 시선 뒤에서 풍겨오는 정치인들의 비릿한 냄새에 코를 찡긋거렸다. 일단 그들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장군, 워싱턴에서 한 달 전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허리를 잘라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는 의견에 적극 찬성합니다. 그런데 인천에 상륙하시겠다고요? …인천은 단념하고 군산은 어떨지요? 군산은 현 낙동강 전선과 좀 더 가깝고. 인천과 같은 자연적 장애도 없습니다.”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이 먼저 입을 뗐다.

“맞습니다. 안전한 군산으로 변경하는 게 좋겠습니다.”

셔먼 제독이 콜린스와 입을 맞춘 듯 적절히 끼어들었다. 둘은 맥아더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는 다시 파이프를 집어 들고 재를 털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카펫 색깔이 회색인 이유는 다 있었다. 시계는 제 역할을 묵묵히 했다. 그렇게 1분이 흘렀다. 모두 노련했다. 어느 하나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별 한 개 무게의 차이인지 에드워드 중장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맥아더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인천이 왜 안 된다는 거요? 승리가 싫어서? …아니면 이 맥아더가 싫어서?”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합니다. 평균 6.9미터에 이르고 가끔 10미터를 넘기도 합니다. 저희 군함은 들어간 지 10분도 채 안 돼 발이 묶일 겁니다. 게다가 배를 돌리기엔 항구가 지나치게 협소합니다.”

셔먼이 맥아더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호기롭게 일어선 에드워드도 한마디 거들었다.

“간조 때에는 3.2킬로미터나 되는 갯벌이 노출되며, 비어(飛魚) 수로라 불리는 유일한 진입 수로는 폭이 2킬로미터, 수심은 평균 14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뢰 부설에 용이한 지점이라 전함 한 척이라도 좌초되면 선단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해군을 대표하는 셔먼은 공군인 에드워드가 설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설사 인천항에 안전하게 근접하더라도 항구 전면에는 월미도가 버티고 있습니다.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패한 이탈리아 안치오 상륙전을 기억하시죠? 혹 월미도에 적의 예비대가 구축되어 있다면 상륙도 하기 전에 배후에서 포격을 받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인천항에 무사히 왔다 치고 살펴보겠습니다. 인천항 부두 안벽의 높이는 5미터에 달합니다. 과연 병력 상륙과 자재 양륙이 용이하겠습니까?”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잠자코 있던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이 결정타를 날렸다.

“장군, 상륙작전 교범을 들춰보시오. 그 속에서 금기 사항만 추려보면 바로 인천이오, 인천!”

새까만 후배의 도발에 맥아더는 반응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더 이상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때 이른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자 맥아더가 일어섰다. 그는 파이프 대신 지시봉을 들었다. 곧장 1:50,000 지도에서 한 지점을 가리켰다. 월미도였다.

“그린 비치!”

워싱턴에서 온 장성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세 개의 경로를 개발했소. 그린, 레드, 블루. 우선 이른 새벽 만조 시간에는 그린 비치 월미도에, 저녁 만조 시간에는 인천항 북쪽 레드 비치에, 마지막으로 주안 염전 지역인 블루 비치에 각각 상륙하는 것이오. 셔먼 제독이 우려한 잠재적 배후의 적을 먼저 치면 되겠소?”

지시봉은 다시 월미도를 가리켰다. 맥아더의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모두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중 콜린스의 머리 회전이 가장 빨랐다.

“상륙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다른 장군들이 말했다시피, 갯벌이 우리 탱크를 통째로 삼켜버릴 겁니다. 더구나 해병대가 무슨 수로 그 높은 해안 벽을 기어오른단 말입니까?”

맥아더는 파이프에 새 연초를 차분하게 다져 넣으며 말했다.

“사다리가 있잖소.”

“사, 사다리요?”

셔먼은 그의 귀를 의심했다.

“이미 일본 고베에서 알루미늄과 나무로 사다리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맥아더는 한술 더 떴다. 셔먼은 밀릴 수 없었다.

“더 심각한 건, 장군 말씀대로 월미도를 먼저 치려면 새벽 만조 시, 2시간 안에 상륙해야 합니다. 그럼 한밤중에 이동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적에게 들키지 않고 빛도 없이 함대를 움직인다는 말씀입니까?”

“월미도 아래 팔미도란 아주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 등대가 있소.”

워싱턴 불청객들의 입에서 너나없이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콜린스가 총대를 멨다.

“식은 죽 먹기네요. 그럼 전 트루먼 대통령께 돌아가 말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다리와 등대가 있으니 인천 상륙작전을 허가해달라고요.”

여러 장성들도 웃었다. 맥아더도 잠시 덩달아 웃다가 이내 안색을 바꾸었다.

“인천? 적도 당신들처럼 웃을 것이오. 누가 말도 안 되는 곳에 상륙작전을 펼친다고 생각이나 하겠소.”

맥아더는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인천에 상륙하겠단 말이오! 전쟁의 국면은 곧 바뀔 것이니, 당장 워싱턴으로 돌아가 트루먼에게 승낙을 받아내시오! 장군들.”

불청객들은 압도당했다. 짧은 말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어떤 곤혹스러운 질문에도 맥아더는 견고했다.

“일본까지 왔으니 녹차나 한잔 대접받아 볼까요?”

콜린스는 잠시 숨을 돌리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