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햇살 속에 찾아온 것

또로로로롱.

얼음판 위로 유리구슬이 굴러가듯 시린 자명종 소리에, 나미는 눈도 뜨지 않고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시트 옆에선 아직도 새근거리는 남편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눈을 뜨고 보니 6시 30분. 머리는 멍한데 몸은 저절로 움직인다. 나미는 살그머니 침대를 빠져나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야채를 갈아 주스를 만들고, 밥을 올린 후 아삭한 샐러드용 야채를 씻어서 미리 건져놓았다. 남편의 아침은 포슬포슬한 밥과 정갈한 반찬, 딸 예빈의 아침은 샐러드를 곁들인 간단한 토스트와 우유니까.

바지런히 움직이는 나미의 주방 라디오에서는 Tuck & Patti의

나미는 머리를 질끈 묶고 예빈의 교복과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림질한 후 재빨리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찬물에 세안을 하다 잠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마흔 셋.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스물 셋이었던 것 같은데, 실감할 순 없지만 어느덧 중년이다. 나미는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눈가에 하나둘씩 상륙하려던 잔주름이 긴장해서 팽팽해질 정도로.

하지만 그 확인의 시간도 길게 가지는 못했다. 시간은 이제 대략 6시 50분. 아직은 서둘러야 할 때다.

“일어나야지.”

예빈의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걷어내자, 잘 자던 얼굴이 확 찡그려졌다. 고등학생인 딸 아이는 나미를 닮아서인지 유난히 아침에 약하다.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간 딸을 어르고 달래 간신히 깨워놓은 후, 나미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거 먹어. 이것도.”

눈도 다 뜨지 않은 남편은 녹즙이 담긴 컵을 한 손에 들고, 나미가 내민 비타민과 혈압 약을 받아 들었다.

남편과 예빈은 제각기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야 식탁 앞에 앉았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각자 뭔가에 바쁜 모습이다. 신문 보는 남편은 그렇다 치고, 예빈은 예빈대로 핸드폰을 보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 애들은 핸드폰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식받는 것’이라던 말이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다. 나미는 아침부터 잔소리하기가 싫어 가볍게 한숨만 쉬곤, 그냥 빈 컵 가득 우유를 채워주었다.

나미도 이제 좀 배를 채워볼까 하고 의자에 앉으려던 순간, 남편이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뉴스 좀.”

나미의 엉덩이는 의자와의 거리를 1센티미터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퉁기듯 멀어져갔다.

뉴스 채널로 바뀐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아침부터 교통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올림픽 대로.... 부상자 둘.... 교통 혼잡....

듣다 보니 나미도 병원의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일주일 쯤 전에 승용차 백미러가 팔을 치고 지나가는 통에, 친정 엄마는 팔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친정 엄마는 보상도 받을 만큼 받았으니 괜찮다 괜찮다 말하긴 했지만, 내심 사위와 손녀가 보고 싶어 안달이라는 걸 모를 나미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말이라도 꺼내볼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 병원 좀 가보지들?”

“잘 먹었습니다.”

예빈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삭바삭하게 구워낸 토스트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마저 먹어.”

대답은 역시 없었다. 사춘기라서 그런지 예빈은 요즘 부쩍 나미와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나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남편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응?”

이쪽도 못 들은 척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번 말해주려는데, 때마침 울린 핸드폰 벨소리에 재깍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두 사람 다 결국 아침 식사는 반 이상 남기고 말았다. 나미의 얼굴이 슬며시 부루퉁해졌다.

“당신 거랑 장모님 거랑 해서 백 하나씩 사.”

모른 척했지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걸까. 타박타박 현관까지 배웅을 나온 나미를 보고 남편이 지갑을 열더니 빳빳한 상품권을 꺼내 들었다. 나미는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뭐 이런 걸…….”

신발에 발을 끼우던 예빈이 옆에서 그 지갑을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갈망이 깃든 무표정한 시선. 딸아이의 마음을 포착해낸 남편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걸치고 물었다.

“너도 줘?”

“……아, 빠, 사, 랑, 해, 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내뱉은 예빈의 말은 뭐랄까. 지구인과 처음으로 조우한 외계 로봇이 건넨 인사처럼 어색했다. 그래도 남편은 딸의 애교가 기특하다는 얼굴이었다. 결국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이 빠져나오자 예빈의 얼굴에 간만의 생기가 돌았다.

용돈이 필요했나? 나미는 허탈한 얼굴로 웃어버렸다.

띠릭, 현관문이 열렸다. 남편이 먼저 나서고 그 뒤를 예빈이 뒤따랐다.

나미는 그래도 혹시나 싶어, 바삐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큰 소리로 당부했다.

“할머니한테 전화라도 드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시켰다고 해서 전업주부의 아침 업무가 끝나는 건 아니다. 결혼 20년차쯤 되면 청소에 빨래, 설거지 정도는 식후 양치질처럼 아침나절에 모조리 끝내 놔야 한다는 게 보수파 나미의 지론이었다.

물 흐르듯 가사 일을 처리하는 나미 옆으로 TV는 계속 아침 드라마를 흘려냈다. 거실을 청소하던 나미는 아침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훌쩍이는 소리에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채널을 돌리자 학교 폭력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딱 예빈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나미는 청소 도구를 든 채 심각한 얼굴로 어머, 어머를 연발했다. 학부모들에게 교내 폭력 관련 뉴스란 웬만한 호러 영화보다 더 공포로 다가오는 법이다.

‘하여튼 요새 애들은…….’

나미가 중얼거렸다. 예빈의 얼굴이 떠오르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걱정을 떨쳐냈다. 예빈은 얌전한 아이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라 요즘 나미와는 새삼 내외를 하고 있었지만 별 문제 없을 것이다. 나미는 그렇게 믿었다.

아침 설거지와 청소를 해치우고 아침 토크 쇼를 들으며 빨래를 갰더니, 홈쇼핑에서 기다리던 광고가 나왔다. 남편의 건강식품이었다. 나미는 다 갠 수건들을 잽싸게 옆으로 밀어놓고 전화기를 들어 익숙하게 주문했다.

집안일은 그 뒤로도 좀 더 이어졌다.

마지막은 냉장고 정리. 비워낸 반찬 통에서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깨끗하게 닦아낸 뒤 싱크대 소독까지 마쳤다. 나미는 조금 지친 얼굴로 느릿하게 고무장갑을 벗었다.

이제 다 끝났다.

헌데 차가워진 손끝이 경련하듯 살짝 떨리고 있었다. 혈당이 떨어져 생기는 현상이다. 어릴 때부터 당뇨기가 있었던 나미에게는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또 시작이네.’

오늘은 냉장고 정리까지 하느라 아침식사가 평소보다 꽤 늦어졌던 모양이었다. 나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곤, 예빈이 남기고 간 토스트와 우유를 들고 발코니 앞 테이블에 앉았다.

‘따뜻하다.’

유리창 너머로부터 봄 햇살이 온기를 머금고 쏟아져 내렸다. 얼마 전에 마지막 눈이 내렸던 것 같은데, 봄은 벌써 이만큼이나 다가와 있었다.

식어버린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살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으려니 공허한 마음에 부드러운 공기가 차오르는 기분이 되었다. 나미의 눈가로 나른한 아지랑이가 맴돌았다.

꽃은 언제 피려나. 여긴 서울이니까 좀 늦겠지. 무심코 바라본 바깥 풍경에 홀린 듯 시선이 머물렀다.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신나게 장난을 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이미 한참이나 등교 시간에 늦었을 텐데도 여고생들은 아랑곳 않는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입, 발그레한 볼이 예뻤다. 들릴 리 없는 웃음소리가 나미의 귓가에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그래서 더 아름다운 청춘. 나미의 시선은 그 여고생들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입가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까지 걸쳐져 있었다. 나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여고 시절. 그 찬란했던 순간.

영원할 줄 알았다. 그 반짝거림이 언제까지나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줄 알았다. 이제는 지나가 버린 겨울처럼 하얗게 빛바랜 추억이 되고 말았지만. 그저 이렇게 봄 햇살이 눈부신 날, 그 시절을 곱씹다 뒤늦게 두근대는 가슴을 가만히 눌러볼 수밖에 없는 추억으로.

“좋을 때다…….”

나미는 봄처럼 내려앉은 그리움에 취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