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온다.

라인업에 있던 서핑보이들이 일제히 보드의 노즈를 해변 쪽으로 돌렸다. 유유자적 서핑보드에 엎드려 있던 탄도 서서히 해변 쪽으로 패들해 나갔다. 타이밍이 중요했다. 파도가 등 뒤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성급하면 데크 위에 올라서기는커녕 바로 뒤집어지고 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파도가 따라붙기를 기다리던 탄이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데크 위에 일어섰다. 제법 큰 파도였다. 개의치 않는 듯 탄은 몸을 일으켜 세워 거대한 파도 사이로 시원하게 라이딩 했다. 파도가 만든 거대한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미끄러지는 탄의 뒤로 파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파도를 피해 타던 탄이 마침내 무너지는 파도 속으로 보드와 함께 뛰어들었다. 이어 파도는 탄이 서 있던 자리로 내려와 꽂혔다.

머리 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포말. 물속에서 탄은 생각했다. 어쩌면 잘 온 걸지도 몰라, 캘리포니아에. 너무 늦은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3년 전 캘리포니아에 처음 왔을 때, 그때 했어야 했다.

제이는 백사장 파라솔에 누워 선텐을 하는 새로 온 금발들에게 열심히 치근대는 중이었다. 벌겋게 그을린 채로 시시덕대며 계집애들 등짝에 오일을 발라 주는 꼴이라니.

탄은 부러 제이 옆에 서핑보드를 훅 꽂았다. 금발들의 시선이 금세 탄에게로 쏠렸다. 탄은 시선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듯 서핑슈트 상의를 벗어 허리춤에 걸쳤다. 금발들이 선글라스를 내려 서핑으로 다져진 탄의 다부진 상체를 훑곤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까르르 웃었다.

「아가씨들 이 아시아 보이한테 눈독 들이지 마. 아주 위험한 녀석이야.」

제이가 금발들에게 짐짓 엄포를 놨다.

「왜? 혹시 야쿠자?」

「뭐 비슷하지.」

제이가 괜스레 음산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러자 그녀들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탄을 올려다보았다. 탄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마약상이거든. 나.」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툭 내뱉었다. 진지한 탄의 표정에 혼란스러운지 금발들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 그녀들 중 하나가 눈치를 보며 되묻자 탄이 개구지게 씨익, 웃었다.

「뭐야! 진짠 줄 알았잖아.」

농담 한마디에 분위기가 친밀해졌다. 제이는 이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휴대폰을 꺼내 들어 재빠르게 그녀들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금세 해가 기울었다. 붉게 물든 해변가에 선 제이가 제시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제시도 싫지 않은지 제이를 밀쳐내지 않았다. 누가 보면 1년은 사귄 줄 알겠네. 어떻게 여자들은 하나같이 저런 놈에게 속아 넘어가는 거지? 언젠가 제이에게 물었더니 그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어쨌든 그 순간만은 진심이라고. 진심으로 그녀들을 사랑한다고. 제이의 그 진심은 늘 통했다. 다만 그 짧은 진심이 때때로 탄을 괴롭히는 게 문제였다. 제이의 진심이 식어 버리면 그녀들은 언제나 울며불며 탄을 찾아왔다. 그런 그녀들을 달래거나 거절해야 하는 건 늘 탄의 몫이었다.

그건 정말로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도 제이를 정리하는 일보다는 덜 귀찮았으므로 탄은 묵묵히 그녀들을 단념시켰다. 누군가를 어떻게 단념시켜야 하는지 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형은 되돌려주는 법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한결같았다. 그런 한결같은 차가움이 무서웠다. 무엇을 해도 관심을 받을 수 없다. 무엇을 해도 사랑받을 수 없다. 미움조차도 받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이 탄을 슬프게 했다. 그래도 그 모든 외로움을 견디리라 생각했다.

언젠가, 언젠가는이라는 일말의 기대 하나로 곁에 있고자 했다. 그러나 형에게 난생처음 되돌려받은 것은 애정이 아니었다. 확실한 거부였다. 유학을 떠나던 날 원이 건넨 인사는 쉽고, 짧고, 솔직했다.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돼. 영어? 귀찮으면 하지 마. 그냥 먹고 놀아. 고민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고. 원래 있는 집 서자들은 먹고 노는 거야. 꿈을 갖는 게 아니라. 그리고 가능하면, 돌아오지도 말고.」

그 순간 탄은 깨달았다. 이것은 유학이 아니라 유배라는 걸.

원은 자신의 엄마에게 빼앗긴 것들을 되찾고 있는 중이라는 걸.

「근데 넌 원망 안 해? 널 미워하는 형이나, 널 낳은 엄마나, 단 한 번도 편들지 않는 아버지나.」

제이가 입 안에 베이컨을 쑤셔 넣으며 탄에게 물었다.

「글쎄. 누군가를 원망하기엔 난 너무 게을러.」

커피 한 모금을 넘기며 탄이 대답했다. 스텔라가 다가와 비어 가는 탄의 잔에 커피를 새로 채웠다. 스텔라는 이 레스토랑의 유일한 한국인 웨이트리스였다. 한국 이름은 몇 번이나 물어도 가르쳐 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 체념하고 있었다. 체념한 사람과 단념한 사람 사이의 공통된 정서. 그것은 마치 위로 같았다. 탄이 굳이 이 레스토랑을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스텔라가 무심히 물었다.

“넌 맨날 뭘 그렇게 써?”

“학교 숙제요. 에세이.”

“숙제 잘 안 하게 생겼는데.”

“안 하게 생겼으니까 하는 거예요.”

“반항의 대상이 누군데? 선생님?”

“커피 고마워요.”

“더 필요하면 얘기해.”

스텔라는 더 묻지 않고 돌아섰다. 레스토랑 창가 테이블에 앉아 커피나 음식 따위를 먹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때때로 정말 아무생각 없이 사는 재벌집 서자가 된 것 같아서 그렇게 살라던 형이 생각났고, 그래서 외로워졌다. 생각하지 말라는 형의 명령을 형 때문에 도무지 지킬 수가 없었다.

*

방학이면 방학이지 방학식은 또 뭐야. 영도는 학교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연신 하품을 해 댔다. 그런 영도가 신경 쓰인 기사가 힐끗힐끗 백미러로 영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재밌는 장난감을 찾은 듯 차창 밖을 바라보는 영도의 눈빛이 빛났다.

“아저씨, 차 세워요.”

기사가 군말 없이 길가에 차를 세웠다. 재빨리 차에서 내린 영도가 저 멀리 느리게 걸어가는 준영에게로 달려가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친구야, 학교 가?”

준영이 예상치 못한 영도의 등장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어깨 펴, 인마. 누가 보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아. 아, 학교가기 싫다. 그치, 친구야.”

영도가 준영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준영은 영도의 팔을 감히 쳐 낼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말없이 걷기만 했다. 준영의 대답 따위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영도는 준영에게 억지 어깨동무를 한 채 똘마니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지금 명수 작업실로 와. 나 글루 간다. 어, 준영이랑.”

명수의 작업실은 제국고 아이들에겐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놀이터라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본보기라고 불리는, 사회 배려자 전형으로 들어온 준영에겐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영도가 힘을 주어 공을 던졌다. 탕! 벽을 맞고 튕겨 나온 공이 다시 영도의 손으로 돌아갔다. 탕! 영도가 다시 공을 던졌다.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다. 벽에 선 준영은 영도가 공을 던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움찔 눈을 감았다. 영도가 던진 공은 계속해서 벽에 서 있는 준영의 얼굴께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다. 영도의 똘마니인 효준과 상우는 영도 편에 서서 준영의 표정을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친구야, 방학인데 뭐 할 거냐?”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공을 던지며 영도가 말했다. 대충 던지는 것 같은데도 용케 준영을 맞추지 않았다.

“이렇게 매일 보다가 안 보면 보고 싶겠다. 그치.”

준영이 대답하지 않자 영도가 공을 틀어쥐고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효준과 상우가 야아, 쟤 대답 없는 거 봐라, 영도 서운하겠다아, 하며 괜스레 분위기를 조성했다.

“왜. 넌 나 안 보고 싶어? 너무 매정한데 나한테?”

영도가 다시 준영을 향해 공을 던졌다. 이번엔 공이 준영의 가슴께에 퍽, 꽂혔다.

“아, 미안. 안 다쳤어?”

영도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준영은 그저 입술을 꾹 깨물 뿐이었다.

“최영도 피칭 후지네. 조심 좀 해라. 누가 보면 우리가 쟤 괴롭히는 줄 알겠다.”

순간 영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러게. 그럼 손효준 니가 한번 서 볼래?”

“어?”

“서라고. 벽에.”

야, 왜 그래. 상우가 영도의 어깨를 장난처럼 툭툭 치며 말렸다. 영도는 상우가 만졌던 어깨를 흘끗 한번 쳐다보고 상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니가 대신 설래?”

차가운 시선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효준이 애써 장난인 척 굴며 준영의 옆에 가 섰다.

“아, 설게. 서 준다, 내가. 던져.”

“내가 던진다고는 안 했는데? 친구끼리 공평해야지. 준영아.”

영도가 준영을 불러 제 옆에 세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효준은 영도가 준영에게 공을 쥐어 주는 모습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니 차례야. 던져.”

“여…… 영도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영도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영도는 만족할 테지만 효준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물론 영도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영도가 가만있지 않겠지. 이래도 저래도 굴욕이었다. 차라리 그냥 둘에게 한 번에 맞는 게 나았다. 준영이 망설이자 영도가 달래기라도 하는 양 다정히 말했다.

“그래 뭐, 던져도 맞고. 안 던져도 맞고. 센 놈한테 맞느냐, 좀 덜 센 놈한테 맞느냐 그게 문젠데. 근데 사실 더 큰 문젠 앞으로도 니 인생이 쭉 이럴 거라는 거지. 왜?”

여기까지 말하고선 영도가 준영을 향해 비죽 웃었다. 소름끼치도록 잔악한 웃음이었다.

“우리가 커서 니 고용주가 될 테니까.”

준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영도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선택해, 얼른.

다정히, 그러나 선명하게 명령하는 영도의 얼굴을 보며 준영은 생각했다. 정말로 죽이고 싶다고. 생각과 동시에 제 평생을 걸고 덤벼도 녀석들에게 한 치의 해도 입힐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공을 쥔 준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들이 뭐라고. 돈이 뭐라고. 재벌이 다 뭐라고! 준영은 그대로 영도의 얼굴을 향해 공을 던졌다. 영도는 당황조차 않고 몸을 살짝 틀어 공을 피했다. 공은 그대로 벽거울에 처박혔다. 부서진 거울 조각이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 새끼가 미쳤나!”

정적을 깬 건 효준이었다. 준영은 효준의 말에 반응조차 없이 영도만을 곧게 쏘아보았다. 미세하게 떠는 듯도 했다.

“오…… 가난하지만 자존심은 지키는 스타일이다?”

영도가 준영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영도가 손을 뻗자 준영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미 각오하고 저지른 짓이다. 영도는 그런 준영의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구석에 놓여 있던 제 가방을 챙겨 들고는 툭툭 준영의 어깨를 쳤다.

“그냥 몸이나 지켜. 야, 건강이 제일이지. 어후, 난 무서워서 도망가야겠다. 개학하면 보자. 부디 즐거운 방학 보내고.”

“어, 가라.”

대답하며 효준이 준영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영도는 그 모습을 본 건지 만 건지 가볍게 뒤돌아 문 쪽으로 향했다. 똘마니들이 순간 겪어야 했던 굴욕과 분노는 고스란히 준영의 몫이었다. 욕지거리, 이어 들리는 발길질 소리, 녀석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영도는 튜닝을 맡겨 놓은 제 바이크를 찾으러 가야겠다는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