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제 곧 60킬로그램 급 결승전이 열리겠습니다. 독일에 칼 마하엘 선수와 한국의 고두영 선수 경기 시작합니다.”

경기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코리아 그랑프리 국제 유도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장내는 흥분과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르며 결승 직전의 긴장감이 한껏 고조되었다.

경기장 한쪽 끝에서는 두영이 도복을 매만지며 생각을 집중 시키고 있었다. 두영의 훤칠한 외모와 훈련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은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옆에는 코치인 수현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두영에게 경기 전략을 확인 중이었다. 두영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현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응원했다. 두영의 눈이 매섭게 번뜩이며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두 선수가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심판 앞에선 두영은 상대인 독일 선수에게 인사를 하고 숨을 훅 내쉬었다. 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독일 선수는 두영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기선 제압을 하려는 듯 무섭게 쏘아보았다. 서로 치고 빠지면서 본격적인 신경전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두영이 먼저 치고 들어가며 선두를 잡았다. 그러나 독일선수가 예상했다는 듯이 뒤로 물러나며 재빠르게 방어했다.

다시 두 선수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 먼저 틈을 보이 기라도 하면 재빨리 이를 드러내고 물어뜯을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오고 갔다. 그때였다. 독일 선수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두영을 자극했다.

“슈! 슈슛!”

기합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비신사적인 행동이었다. 독일 선수가 이런 행동을 계속하자 두영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순간 이번에는 독일 선수가 파고들면서 두영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두영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면서 공격을 받아냈다. 자칫하면 한판이 될 수도 있던 순간이었다. 재빠른 동작으로 상대를 밀어내며 방어에 성공한 두영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공격에 실패한 독일 선수도 재빨리 경계선 밖으로 빠졌다.

심판은 다시 손을 들어 두 선수에게 중앙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결승전답게 잠시 떨어지는 잠깐의 순간조차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다시 경기를 재개하자 이번에도 독일 선수가 입으로 괴상한 음을 내며 두영의 신경을 긁었다. 눈빛이 날카로워진 두영이 달려들어 독일 선수에게 다리를 걸었다. 제대로 들어갔다면 뒤로 넘어지면서 점수를 따게 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독일 선수가 완강하게 버티며 두영의 공격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독일 선수는 오히려 상체에 힘을 실어 앞으로 쏟으면서 두영의 어깨를 밀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수현과 감독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둘은 동시에 독일 선수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이었다. 수현은 두영을 향해 다급하게 사인을 보내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두영은 두 발에 꼿꼿하게 힘을 주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느라 수현의 외침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때였다. 독일 선수가 다시 기합을 지르며 두영을 메쳐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넘어지는 각도가 커서 충격의 강도도 무척 세게 느껴졌다.

쿵. 두영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경기장 안에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독일 선수를 안고 그대로 넘어지는 바람에 두영의 몸 위로 독일 선수의 무게까지 더해졌다. 순간 두영은 머리가 가장 먼저 바닥에 부딪치며 심한 통증이 뻗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순식간에 소음이 잦아들었고 귀에는 삐 하는 경보음 소리만 가득했다. 정신이 점차 아득해지면서 물에 빠진 것처럼 시야가 뭉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선명 하게 보이던 모든 것들이 멀어지면서 희뿌연 안개가 몰려들었다. 두영은 다시 선명하게 보려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멀어진 것들은 아예 모습을 감춰버리고, 세상의 빛이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수현은 병원 의자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망연자실한 얼굴에는 어두운 기색이 가득했고, 귓가에는 의사의 말이 생생하게 맴돌았다.

‘외상 시신경 병증입니다. 복싱 같은 과격한 운동으로 인해 안구나 머리에 큰 충격으로 시신경에 손상을 입으면 나타나는 병입니다. 지금도 거의 안 보일 텐데 점점 더 나빠질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시력을 잃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아직까지는 치료방법이 없어요.’

몇 초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순간에 이런 끔찍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수현이 머리를 벽에 짓이기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서 기권이라도 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쨍그랑! 병실 안에서 병이 깨어지며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현의 얼굴이 잿빛처럼 변했다. 다른 환자들이 기겁한 얼굴로 병실을 뛰쳐나왔다. 수현은 불안한 생각에 병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처음 수현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붉은 피가 사방에 튄 하얀 병실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수현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두영을 쳐다보았다. 두영이 손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두영의 손목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현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두영아!”

수현이 달려가 피가 흐르는 두영의 손목을 부여잡고 지혈을 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상황에서 구해달라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아무도 없나요? 저기요! 선생님 빨리요!”

두영은 목석처럼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텅 빈 상자처럼 어둠이 가득한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수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두영의 손목을 짓눌렀다. 힘을 주려고 할 때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의사를 기다리는 잠깐 의 시간이 기나긴 고통으로 느껴졌다. 수현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두영아 제발…….”

두영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세상의 빛이 사라지는 순간 두영까지 사라진 것 같았다.

1부

절망이라는 어둠

정갈하게 정리된 책상 가운데에는 성경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앉은 두식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고 성경을 집어든 그는 엄숙하게 책을 펼치고 그 안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신문기사를 꺼내 읽었다.

‘유도 국가대표 고두영 실명.’

고두영.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 이었다. 그러나 이 기사 덕분에 교도소에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두식은 입가에 씩 미소가 번졌다.

두식은 집어든 기사가 구겨지지 않도록 다시 책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그리고 마치 신주단지라도 되는 양 성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나서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세워두었다.

며칠 후 두식은 접견실이라고 적혀 있는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결전의 날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의 심사위원들이 일렬로 늘어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식이 안으로 걸어오며 인사를 건네자 눈을 힐끔거리며 얼굴을 확인하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누구 하 나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안 될 거 알면서 사람을 왜 이리 귀찮게 해?’

두식은 오늘은 기필코 다른 결과를 이루리라 생각하며 넙죽 허리를 숙였다. 오른쪽 마지막에 앉은 남자 심사위원이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올해도 신청하셨네요?”

“또 뵙습니다.”

남자 심사위원 옆에 있던 여자 심사위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꼬리를 낚아채며 말을 이었다. 한 손에는 얼떨결에 받은 광고 전단처럼 두식에 대한 서류를 들고 건성으로 뒤적거리고 있었다.

“가석방이 되신다면 나가서 어떻게 지낼지 계획은 있으신가요? 보니까 별다른 자격증도 안 따신 거 같고.”

여자 심사위원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두식을 바라보았다.

“자격증뿐인가요. 저 같은 놈은 여기서 나갈 자격도 없죠.”

두식은 시선을 마주하며 맞장구를 치듯 대답했다. 두식이 스스로를 자책하며 하소연 하자 심사위원들은 이건 또 무슨 전략 인지 의심하는 눈길을 보냈다. 두식은 자신이 반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 더 강조하기로 마음먹고 말을 이었다.

“남의 돈 끌어다 사업한다고 사기나 치고……. 저 때문에 고 통 받은 분들 마음을 생각하면 전 형량 채우고도 더 처박혀 있어야 맞습니다.”

남자 심사위원이 두식의 손에 쥐어진 성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끼어들었다.

“그건 콘셉트인가요?”

“그럴 리가요. 사람한테 치던 사기를 하나님한테 칠 순 없지 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재빠르게 대답했다.

두식은 무릎 위에 성경을 펼치고 고이 끼워둔 신문기사를 꺼내들었다.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식의 손을 향했다. 두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심사위원들이 있는 책상에 신문기사를 올려두고 다시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유도국가대표 고두영?”

신문기사를 눈으로 훑으며 여자 심사위원이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심사위원이 신문에 난 고두영의 사진과 두식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이게 무슨?”

“그 아이가 제 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