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에는 달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머리로는 인식하는 일들이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

달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감각되어 가슴을 짓누르는 지금처럼.

동현은 빗물에 씻겨 가는 유리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서서 강박적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빌딩숲 위로 검게 드리워진 하늘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찌가 움직이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집요한 시선이다.

그러나 그의 시선 끝에 닿는 것은 달이 아니라 전광판 위로 빠르게 지나가는 긴급 속보다.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본다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사망 기사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마치 영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 버린 것처럼.

딸깍.

문이 열렸다.

‘밤 풍경’ 팀들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동현은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수습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창문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창밖 풍경들이 어둠 속으로 물러나고, 환하게 불 밝혀진 스튜디오 내부의 풍경이 유리창에 낯설게 그려졌다.

늘씬한 허벅지 라인이 드러나는 H형 스커트에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홍은희 작가가 책상 위에 원고더미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카메라를 의식하는 여배우처럼 동현 쪽을 빤히 바라보며 다리를 꼬았다.

스커트 자락이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가 은밀한 부분이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육 년 전 개봉한 영화 원초적 본능의 샤론스톤 흉내를 내는 것일지도.

동현은 그런 그녀의 교태를 못 본 척 시선의 초점을 흐리며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구겨진 면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기는 했어도 그에게는 뭔가 원초적인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눈썹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크고 어두운 눈가에 그늘을 드리워, 그의 눈빛은 늘 수심이 깊어 보였다.

그것은 그의 허무함과 무기력한 기질에 묘한 매력을 더해 주었고, 어딘가 세기말적 분위기와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너의 눈빛은

뭐랄까…… 제니스 조플린이 죽기 전 내뿜었을 담배 연기 같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죽을 만큼 허무하고 서글퍼져.’

단 한 번, 몸을 섞었던 그날 밤. 영혜는 가늘고 긴 손끝으로 그의 얼굴 윤곽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동현은 그녀와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모딜리아니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 하얗고 가는 그녀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었다.

그 감정들이 사랑이었는지 단순한 열병이었는지, 그건 육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판단하기도 전, 영혜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라디오 부스에 스위치가 켜졌다.

방송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오늘의 첫 곡은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The look of love’로, 홍은희 작가의 선곡이다.

그녀는 오늘처럼 비 내리는 밤에는 스프링필드의 허스키한 보이스를 들어줘야 한다고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웃지만 울고 있는 얼굴이라고, 동현은 생각했다.

올해로 스물아홉이라던가.

동현보다 한 살 아래인 홍 작가는 라디오 교양 프로그램 윤태호 차장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동현의 방송 메인 작가가 되었다.

기획 때부터 함께 작업했던 배 작가가 임신과 출산으로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배 작가와 친했던 디제이 김애란 씨는 홍 작가의 원고가 입에 붙지 않는다며, 아무래도 얼굴 팔아 작가가 된 거 같다고 툴툴거렸다.

맞장구치지는 않았지만, 동현 역시 홍 작가의 원고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웃지만 우는 듯 묘한 미소가 보기 불편했다.

홍 작가
“연결됐어요. 권 PD님.”

음악을 신청한 청취자와 전화 연결을 시도하던 홍 작가가 동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단추가 세 개쯤 풀어진 그녀의 블라우스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골이 내비쳤다.

동현은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라디오 부스에 연결된 토크벨을 눌렀다.

동현
“지금 연결됐으니까 끝나는 대로 바로 불러!”

애란 씨가 손가락을 구부려 동그라미를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현의 수신호에 따라 엔지니어가 음향을 조절했다. 음악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동현은 애란 씨에게 신호를 보낸 후, 빠르게 릴 테이프를 걸었다.

애란
“하이텔로 음악을 신청해 주신 가을여행 님과 전화 연결해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가을여행 님. ‘밤풍경’의 김애란입니다.”
두식
“안녕하신교. 울산에 사는 편두식입니다. 참말로 신기하네. 진짜 내가 아는 그 김애란이 맞는교? 이기 진짜, 진짠교?”

50대 안팎의 걸쭉한 사내의 목소리로 인해, 커피향이 은은하게 풍기던 카페 분위기가 막걸리 단내가 술술 나는 선술집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익명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PC통신으로 신청곡을 받다 보면, 이런 예상치 못한 사태가 간혹 벌어졌다.

라디오 디제이 십 년 차이자 90년대 초반 하이틴 드라마를 주름잡았던 애란 씨의 오랜 팬이라고 고백한 편두식 씨는 울산에서 개인택시를 몰고 있다고 했다.

자기소개를 마친 편두식 씨는 얼마 전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두식
“삼십 년을 함께 살다 보냈으니, 왜 안 그립겠노. 하루 중에 이 시간이 젤로 괴롭다 아인교. 이 맴이 무슨 맴인지, 김애란 씨는 알죠? 그죠?”

동현은 손짓으로 빨리 끊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애란 씨는 난처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이 많은 청취자는 곤란하다.

이 정도면 방송 사고다.

동현
“적당히 끊어야지! 1분이나 오버야. 다음 멘트 빨리 읽어.”

동현은 토크벨을 누르고 애란 씨를 향해 쓴소리를 뱉어 냈다.

일부러 홍 작가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홍 작가
“죄송해요…… 재밌을 것 같아서 연결한 건데…….”

등 뒤에서 홍 작가의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현
“됐어. 멘트나 빨리 줄여 줘!”

동현의 차가운 말투에 홍 작가는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 안에서 애란 씨와 홍 작가 사이에 짧지 않은 말다툼이 벌어졌다.

토크벨을 누르지 않는 이상, 안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애란 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애란
“홍 작가 추천 곡이긴 하지만 이거 틀어도 괜찮은 거예요?”

토크벨 너머로 애란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현은 홍 작가를 힐끗 쳐다보았다.

홍 작가는 책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서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풀이 죽었냐 싶은 얼굴이다.

동현을 향한 홍 작가의 눈빛은 묘했다.

PD를 향한 작가의 시선이라기보다는 남자를 향한 여자의 시선에 가까웠다.

불편하고 불쾌했다.

동현
“신경 쓰지 말고 멘트나 소화 잘해 줘.”

동현의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몹시 건조했다.

음향을 조절하던 엔지니어가 우려 섞인 눈빛으로 동현을 돌아보았다.

엔지니어
“권PD, 그래도 20분짜린 너무 긴데…….”

다음 날 오후, 모두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윤태호 차장이 동현을 호출한 것이다.

아무래도 20분짜리 곡을 썼던 게 문제가 된 모양이다.

동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디귿 자 회의용 테이블이 놓인 방송국 회의실로 들어섰다.

윤 차장은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코발트블루 계열의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조명처럼 윤 차장의 희끗해진 새치 머리를 비추고 있었다.

다소 연극적인 분위기였다.

윤 차장은 동현의 직속 선배였다.

아직 삼십 대였던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윤 차장은 자본에 놀아나지 않는 방송을 만들겠다는 열의로 똘똘 뭉친, 꽤 괜찮은 PD였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차장이라는 직함을 달면서, 그는 점점 변해 갔다.

동현은 그런 윤 차장을 볼 때마다, 망가진 건담 로봇을 떠올렸다.

윤 차장
“타이밍이 안 좋았어. 이번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 같애.”

윤 차장의 입에서 희뿌연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담배 연기는 나선형으로 회오리치며 오후 햇살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동현
“5분짜리 노래만 선곡할 거면 PD가 왜 필요합니까?”
윤 차장
“심야 시간이고……. 요즘…… 주목받는 때잖아. 어쩌면 이번 개편 때 프로가 없어질 수도 있어.”

방송국에는 분기별로 개편이 있다.

라디오 개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청취율 잘 나오는 방송을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공익적인 방송을 추구한다지만 청취율이 안 나오면, 결국에는 프로그램을 엎어 버리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청취율이 높아야 광고가 많이 붙는다.

한 마디로 돈 되는 방송만 하겠다는 것이다.

데스크 앞에서 계산기만 두드리는 임원들의 목적에 맞지 않으면, PD도 작가도 보따리를 싸야 한다.

동현
“심야 프로 질을 높이라면서도 청취율은 포기 못하죠. 그러니까 곡은 안 들리고 시간만 재고 있는 겁니다.”

동현은 서늘한 눈빛으로 윤 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 차장
“타협하기 싫다고 프로를 없앨 거야?”
동현
“장수 프로 만들려고……. 색깔을 죽일 수는 없어요. 경위서 제출하죠, 뭐.”
윤 차장
“국장은 나 혼자 만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이번은 어떻게 넘겨보겠지만 개편 때는 반드시 문제가 될 거다. 새로운 아이템을 준비해. 은희가 감각이 있으니까 같이 만들어 봐.”

윤 차장이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숨 같은 연기를 내뿜었다.

동현은 ‘왜 그렇게 홍 작가를 챙기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가까스로 참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진 않았다.

영혜
‘나는 노골적인 음악은 싫어. 듣는 이의 정서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음악이 좋아.’

라디오국 사무실 복도를 걷는 동현의 뇌리에 영혜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녀의 말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그를 사로잡았다.

현기증처럼.

동현은 껌처럼 달라붙는 그리움을 어쩌질 못하고 라디오국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원고를 정리하고 있던 홍 작가가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홍 작가
“그것도 안 된대요? 촌스러워 정말……. 죄송해요 저 땜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동현
 “결정은 내가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동현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혼자 있고 싶다는 뉘앙스를 풀풀 풍겼는데도, 홍 작가는 고집스럽게 곁에 서 있었다.

홍 작가
“어떻게 됐어요?”
동현
“매일 부딪치는 일이야…….”
홍 작가
“다음 개편 때 없어진다는 소문이 있어요.”
동현
 “소문대로라면 개편 때 사라지지 않는 프로는 없어.”
홍 작가
“제가 맡은 지 한 달밖에 안 됐어요. 작가한텐 좋지 못한 경력이죠.”
동현
“그럴 일 없어. 자료실에 있을 거야. 진행자 오면 그쪽으로 연락해.”

동현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 작가
“PD는 잘리는 경우란 없으니까…….”

홍 작가의 뇌까리는 듯한 말투에, 동현이 뒤돌아섰다.

눈이 마주치자, 홍 작가는 그 특유의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는 듯 우는 그 불편한 얼굴.

홍 작가
“참. 권 PD님.”

다시금 뒤돌아서려는 순간, 홍 작가가 동현을 불러 세웠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정사각형의 커다란 봉투를 들고 동현에게 다가왔다.

홍 작가
“어떤 여자분이 수위실에 맡겨 놨대요. 드리면 아실 거라고 했다는데요?”

정성스럽게 포장된 봉투에는 ‘권동현’이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다.

껌처럼 달라붙어 있던 그리움이 스멀스멀 올라와 목구멍을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굳이 포장을 뜯지 않아도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잉크가 엎질러진 자국이 있는 LP음반.

영혜
‘음악은 지나쳐 버릴 뿐, 결코 머무르는 법이 없잖아. 그러니까, 음악은 사랑과 비슷한 것 같아.’

육 년 전, LP판에 엎질러진 잉크를 닦으며 영혜가 했던 말이다.

다음 날 그녀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고, 알량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동현은 음악을 파는 남자가 되었다.

음악은 장소에 묶이지 않고, 그가 들려주는 음악을 그녀가 들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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