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빈은 지하철역 화장실 변기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그때 옆 칸에 앉은 남자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남자
“쪽팔려 죽겄다. 이 나이에 짝사랑이 뭐냐고.”

짝사랑? 철빈은 반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짝사랑은 그의 전문 분야였다.

남자
“어. 이쁘긴 진짜 이뻐. ……못해. 말이 안 나온다니까.”

남자는 칭얼거리고 있었다.

남자
“떨려서 눈도 못 보는데 뭘 말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철빈은 얼른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옆 칸으로 낑낑거리며 밀어 넣었다.

철빈
“저, 잠시만요.”
남자
“무슨 말을…… 잠깐만,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옆 칸의 남자가 당황한 듯 얼른 전화를 끊었다.

남자
“누구……세요?”

철빈은 명함을 흔들었다.

철빈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전화를 들었습니다.”

그는 명함 윗부분이 잘 보이도록 손을 더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철빈
“일단 이것 좀 받아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말투 때문이었는지, 옆 칸의 남자가 조심스레 명함을 받아 들었다.

명함에 적힌 문구를 따라 읽는다.

남자
“사랑을 이뤄 드립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철빈이 끼어들었다.

철빈
“시라노 에이전시입니다. 연락 주십쇼!”

민영은 한숨을 삼켰다.

소극장을 개조한 사무실은 기본 인테리어도 예쁘고, 소품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손님을 맞이하면 괜히 뿌듯할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 남자 셋이랑 짜장면이나 먹고 있다니.

재필
“왜요, 누나?”

재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민영은 고개 한 번 젓고 말았다.

그래도 재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예쁘장한 얼굴에 늘 단정한 차림이라 보기에도 그럴듯하다.

민영
“아냐, 먹어.”

작게 웃어 주니 재필이 마주 웃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재필
“아.”

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재필은 소품 사이에 놓여 있던 종이 중 하나를 꺼냈다.

하얀 종이에 레이스 장식이 된 청첩장이었다.

재필
“지난달에 메이드 됐던 이정우 씨, 결혼한다네요?”

철빈이 젓가락으로 청첩장을 가리키며 알은체했다.

철빈
“아, 그 큰 바위 얼굴? 보험 설계사랑 연결해 달라고 왔었지? 참, 암보험 이제 해약해야겠다.”
민영
“그거 해약 쉽지 않을 텐데…….”

민영이 말했지만 철빈은 이미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철빈을 흘겼다.

조용하던 병훈이 단무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병훈
“축의금이나 보내지, 뭐. 결혼식장에서 우리 얼굴 보는 것도 민망할 테고.”

연기를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중저음의 목소리는 무척 또렷하다.

재필
“그게 낫겠네요.”
철빈
“그럼 얼마쯤 보내지?”

그때였다.

연극 조명뿐이라 약간 어두운 사무실에 환한 빛이 쏟아졌다.

멤버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틈으로 한 남자가 보였다.

주춤주춤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한눈에 봐도 여기에 잘 어울리는 손님이었다.

연애는 전혀 못할 것 같은 남자였다.

민영은 조용히 입가를 닦았다.

남자
“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조기 축구회 추리닝 차림의 남자가 멤버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남자
“여기가…… 뭐하는 뎁니까?”
병훈
“뭘 바라고 오셨습니까?”

병훈의 질문을 받자 남자는 당황해서 우물거렸다.

남자
“아니 그게……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명함을 받았는데요.”

그의 말에 철빈이 크게 외쳤다.

철빈
“아! 전에 제가 명함 드렸었죠?”
남자
“네, 뭐. 며칠 전에…….”

며칠 전에? 화장실?

민영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어렴풋이 지난주 일이 떠올랐다.

지하철 화장실에서 친구를 기다리던 철빈이 손님이 될 사람 찾았다고, 곧 연락이 올 거라며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 남자인 모양이다.

철빈
“자, 이쪽으로 오세요.”

철빈이 그를 안내하는 사이 멤버들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무대 위 의자에 앉은 남자는 어색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연극 <시라노 드 벨쥬락 Cyrano De Begerac>의 포스터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엔 현황판이라 적힌 화이트보드가 있었다.

[접수 번호 xxx 의뢰인 김00 40% 진행 중.]

[접수 번호 xxx 의뢰인 이00 자료 분석 중.]

그 옆의 주간 일정표에도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의뢰인 000 제4차 시도 @ 종로, 대학로.]

[의뢰인 000 제7차 시도 @ 덕수궁…… 20명 동원.]

이곳이 어떤 데인지도 모르는 남자로서는 이해 못할 말들이었다.

시라노 멤버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그 혼자만 가만히 조명 아래 앉아 있었다.

조화롭게 배치된 가구는 무대 위에 놓여 있고, 갖가지 소품들은 계단이며 의자에 적절히 놓여 있다.

핀 조명까지 비치니 남자가 마치 연극 속 주인공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던 남자는 멤버들이 하나씩 무대 근처로 모이자 어물어물 말을 꺼냈다.

남자
“저, 적혀 있기로는…… 사랑을 이뤄 준다고…….”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철빈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철빈
“쥐도 새도 모르게!”

철빈의 손가락이 한쪽 벽에 걸린 족자를 가리켰다.

족자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남자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남자
“어떻게요?”

이번엔 어느새 그의 뒤에 선 민영이 대답했다.

우아하고 또렷한 목소리는 흡사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민영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 공식석상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은 백 프로 연출된 거예요. 농담 한마디까지 사전에 계획된 거죠.”

말을 하면서도 남자 쪽을 보지 않았다.

무심한 듯, 소품을 매만지고 있다.

남자
“감이 잘…….”

남자는 여전히 갸웃거렸다.

재필이 철빈 반대쪽에 쭈그려 앉아 남자에게 파일을 하나 휘리릭 넘겨 보여 주었다.

재필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들은 왜 다 멋있는 대사나 행동을 하는 줄 아십니까? 대본대로 하니까요.”

이번엔 병훈이 남자의 앞에 서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병훈
“현실은 대본이 없으니까 늘 실수투성이고, 초라한 겁니다. 이제 선생님의 삶은, 적어도 연애 문제만큼은 대본이 있는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 모든 건 대사였다.

남자는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민영은 늘 이때가 기분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묘하고 정교한 타이밍이다.

현실에서 연기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마지막 대사는 철빈의 것이다.

철빈
“한번 믿어 보시죠?”

사무실 구석에서 프린터가 종이 몇 장을 뱉어 낸다.

종이엔 ‘김현곤’에 대한 신상명세가 쓰여 있었다.

나이, 키, 몸무게, 혈액형, 직업 등.

재필이 종이를 정리해서 멤버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번 의뢰인, 현곤이 그들 가운데 앉아 입을 열었다.

현곤(남자)
“조기 축구 끝나고 아이스커피 한 잔 마실라고 갔다가 사랑에 빠져 버렸어요. 제가 조기 축구계의 조기 축구계 베컴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후로는 프리킥이 자꾸 삑사리 납니다. 사랑은…… 원래 사람을 망가뜨리는 겁니까?”

그는 은근히 ‘사랑에 빠진 남자’ 분위기를 잡았다.

추리닝 차림에 어울리진 않았다.

게다가 조기 축구계의 베컴이라니.

민영이 시큰둥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민영
“대부분의 여자들은 조기 축구하는 남자들 싫어해요.”
현곤
“그 재미있는 걸 왜?”

현곤은 진심으로 의아한 듯 물었지만 민영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걸 모르는 시점에서 이미 탈락이다.

현곤은 어떻게 그녀를 만났는지, 자신이 바라는 연애는 무엇인지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현곤
“둘이 같이 커피도 마시고, 속 깊은 얘기도 하고. 집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싶어요. 또 기념일도 챙기고…….”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민영의 얼굴엔 지루한 기색이 짙어졌다.

병훈이 민영의 손을 톡 쳤다.

감정이 너무 드러났던 모양이라 생각해서 민영이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병훈은 다른 뜻이었나 보다.

병훈
“저거 끝까지 들어야 돼?”
민영
“……네.”

재필
“어디 보자…….”

재필이 현황판 화이트보드에 ‘현곤 프로젝트’라 적었다.

그 밑으로 현곤이 좋아하는 여자의 사진을 붙였다.

카페에서 일하는 사진, 길을 걷는 사진, 친구와 노는 사진 등 다양하다.

뿌듯하게 자료들을 보던 재필이 멤버들 앞에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재필
“이름 조선아. 나이 24세, 키 162cm, 몸무게 50kg 추정.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커피숍에서 일하고 퇴근 후엔 요가 학원에 다닙니다.”

한 장씩 짚어 가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상한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민영
“그 사진은 뭐냐?”

민영이 깔깔 웃으며 사진을 가리켰다.

재필은 당황해서 얼른 사진을 떼 버렸다.

재필
“어?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지…….”

요가 학원에서 찍은 사진인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 사진이라 재필까지 찍혀 있었다.

선아 뒷줄에 앉아서 어설프게 한쪽 다리를 목 뒤로 넘기려고 끙끙거리는 사진이었다.

철빈
“요가 잘하네.”

철빈이 한마디 하고 웃었다.

재필은 얼굴이 빨개졌으면서도 아닌 척 목을 가다듬었다.

그 순진한 반응이 귀여워서 민영은 또 한 번 웃었다.

재필
“큼. 2년제 대학 의류직물과를 나왔고, 음악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인디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새 웃음을 지우고 자료를 읽던 병훈이 인디 이름을 보고 구시렁거렸다.

병훈
“난 얘들 싫어. 인디도 아닌 것이 인디인 척.”

못 들은 척하고 재필이 다른 사진을 가리켰다.

찜질방에서 선아가 다른 여자 친구와 군것질을 하는 사진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무척 해맑게 웃고 있었다.

재필
“따로 만나는 남자는 없고, 주로 여자 친구들이랑 어울립니다.”

민영이 사진을 힐끔 보고 픽 웃었다.

민영
“본인은 추리닝만 입고 다니면서 눈은 엄청 높네.”

사진 속 선아는 무척이나 단아하고 청초한 이미지였다.

동그란 눈, 오뚝한 코, 언제나 미소 짓고 있는 입술.

찜질방 사진이라 민낯일 텐데도 무척 예뻤다.

민영은 이런 여자랑 현곤을 이어 주는 게 조금 아까웠다.

이만한 여자라면 좀 더 어리고 야무진 남자랑 붙여도 좋을 텐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은 일이다.

다시 현곤의 사진을 보았다.

민영
“이거 일이 많네.”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